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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문화재단 Feb 05. 2016

예술제본, 책에 혼을 담다

예술제본가 조효은


제본은 많은 양의 종이를 엮어 하나의 단단한 ‘책’ 형태로 만드는 일이다. ‘제본’이 책의 탄생을 뜻한다면 ‘예술제본’은 책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한 장 한 장 책에 깃든 영혼과 마주하는 ‘예술제본’은 어떤 작업일까.


                                                              예술제본가 조효은

‘책’과 ‘만드는 작업’을 평생 함께 할 수 있다면


제본은 고대의 파피루스와 양피지, 중세의 보석으로 치장된 수사본 성경을 지나 풀의 발달로 가능해진 무선제본의 대량생산까지 책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현대에 이르러 전통적인 방식의 수제본이 필요한 책은 줄었지만, 아직도 옛날 방식 그대로 책을 엮는 작업은 상업적인 제본과 구분하기 위해 ‘예술’이라는 수식어를 입게 되었다. 바로 예술제본(LaReliure d’Art)이다.


예술제본은 책을 견고하게 엮고 아름답게 꾸며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일련의 책치레다. 낡은 책을 보수하기도 하고, 특별한 한 권의 책을 새로 만들기도 하고, 사진이나 편지 등 단편적인 기록물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기도 한다. 과거 유럽에서 주로 왕족, 성직자,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예술제본은 오늘날에는 장서수집가나 애서가, 자신만의책이나 작품을 소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 수요자가 된다. 예술제본과의 첫 만남은 스무 살 즈음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스승님께서 작업하시는 모습을 TV에서 본 순간 느낀 강렬함. 책과 만드는 작업을 함께 한다니 두 가지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던가. 1년쯤 후 대학교를 휴학 중이던 나는 계속 뇌리에 남아 있던 예술제본가 백순덕 선생님을 찾아뵀다. 한국 최초의 예술제본 공방 ‘렉또베르쏘’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취미로 배우기 시작한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평생 이 일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스승님의 첫 전시를 준비하며 수제자가 되었고 지난한 배움의 기간이 시작되었다. 실수를 거듭하며 무수히 작업을 반복해나갔다. 다른 이를 가르치는 일은 나를 더욱 단단히 다질 수 있는 경험이 되었다. 그렇게 15년째, 나는 스승님의 뒤를 이어 렉또베르쏘에서 책을 만들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예술제본은 책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일


책은 아름답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존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프랑스의 고문서 보관소(Archives)에서는 수백 년 된 책의 성분을 분석해 현대의 기술력으로 화학적인 복원을 진행하면, 제본가가 책의 물리적인 구조를 재현하는 역할을 맡는다. 예술제본은 종종 건축과 비견되기도 하는데, 책이라는 구조물을 낱장으로 일일이 떼어내는 해체 작업을 거쳐 보수하고, 다시 꿰매고 표지를 장식하는 60여 가지의 체계적인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당연히 예술제본가는 책의 물성과 구조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예술제본이라는 문화가 우리 토양에서 발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작업을 지속하기에 어려운 점이 많았다. 국내의 책은 수제본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 거의 대부분이고 책이 제본까지 완결된 상태에서 판매되는 것이 당연시돼 제본을 위한 에디션이 별도로 출간되는 일도 거의 없다. 제본을 위한 책이 없으니 기존의 책을 분해해 다시 제본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책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종이에 좋지 않은 본드의 사용이나 책의 수명을 고려하지 않은 구조를 볼 때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책이 존재하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제본은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작업이다. 공장에서 기계와 화학제품으로 만든 책이 대량생산되고, 전자책의 확산을 비롯해 다양한 매체가 책의 역할을 나눠 가지는 요즘에도 손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책들이 있다. 독립출판, 소장출판, 한정출판 등 다양한 영역에서 수제본을 하고 있으며 책의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는 일도 기계로는 할 수 없다. 

                                     

                                                                                      

책에 쏟는 정성과 시간이 곧 예술


의뢰인이 가져오는 책을 만날 때 무척 설렌다. 책을 분해하다 보면 책 속의 메모, 주인이 남긴 얼룩이나 네잎 클로버까지… 한 권의 책에는 소장인의 역사가 담겨 있다. 치료받고 새 옷을 입은 책을 만나는 주인의 웃는 얼굴은 긴 시간 힘든 작업의 피로를 가시게 한다.


책을 엮는다는 뜻의 ‘제본’ 앞에 붙은 ‘예술’이라는 단어는 비단 완성된 작품을 형용하는 수사가 아니라 책을 만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책에 최선을 다해 정성과 시간을 들이는 그 과정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예술제본가는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인류의 지적 자산인 책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해 시대와 시대를 이어주는 문화 전달자의 역할을 한다.



예술제본가가 되려면?


➊ 오랜 기간 정직한 노력을 들여 기술적인 숙련도와 지식을 쌓아야 한다.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의뢰인의 책을 망치면 안 될 일이니.

➋ 형식과 내용이 잘 어우러지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책을 만드는 과정뿐 아니라 그 내용까지 아우를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

➌ 무엇보다도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책 한 권을 위해 몇 달 혹은 몇 년간의 수고로움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글 조효은 예술제본가
1979년생. 책을 좋아하고 만드는 것을 좋아해 예술제본을 업으로 삼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고(故)백순덕 선생을 사사한 후 예술제본공방 렉또베르쏘를 운영하며 올해로 15년째 제본가로 살고 있다.

사진 제공 렉또베르쏘    

                                  

* 이 글은 「문화+서울」 2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서울문화재단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문화+서울」은 서울에 숨어있는 문화 욕구와 정보가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예술가들의 창조적 힘과 시민들의 일상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고자 합니다. 「문화+서울」에 실린 글과 사진은 서울문화재단의 허락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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