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날보러와요>와 뮤지컬 <레베카>
연극 <날보러와요>와 뮤지컬 <레베카>는 장르부터 다른 작품이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누가 범인인가, 진실은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미스터리 특유의 흡인력에서 매력이 큰 수작이다.
연극 <날보러와요>와 뮤지컬 <레베카>는 극과 극이다. <날보러와요>는 20년 전 대학로 극단에서 태어났다. 연극인들이 한솥밥 먹으며 너나들이하던 문화적 토양에서 자랐다. 반면 <레베카>는 상업 뮤지컬의 정점에 서 있다. 대형 자본의 투입, 화려한 무대, 영리한 연출 등 제작사 EMK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겼다. 색과 결이 전혀 다르지만, 두 작품은 ‘진실 찾기’라는 이야기의 기본 공식을 공유한다. 두 무대를 지켜보는 이들은 자못 궁금해진다. ‘누가 범인인가, 감춰진 실체는 무엇인가, 사건의 전모는 어찌되나.’ 켜켜이 쌓인 이야기를 들출수록 답은 오리무중이다. 궁금함을 참을 수 없는 관객들은 어느새 이야기의 미궁 속으로 빨려든다. 저 굽이 너머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해하면서, 그리고 종국에는 시원한 답을 얻으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추리, 서스펜스, 수사극이 영원히 사랑받는 이유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이 된 연극이다. 그런 만큼 배경과 대강의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다. 1980년대 말 화성 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에 김 반장과 김 형사가 자원해 온다. 서울에서 왔다. 화성경찰서는 몇 달 사이 본부장이 세 번이나 갈렸을 만큼 답답한 상태다. 전입 온 형사들이 인사를 나누는데 다혈질 조 형사가 헐레벌떡 들어와 외친다. “잡았습니다.” 증거물과 진범의 자백을 확보했다고 한다. 신문에 이들의 활약이 대서특필된다. 승리감이 정점에 이른 순간 5차 피해자가 나타난다. 분위기는 급격히 침체되고 형사들은 1~5차 사건을 처음부터 되짚는다.
실제 사건의 결론을 알고, 영화도 이미 봤으니 ‘연극이라고 새로울 게 있으랴’ 싶을지도 모른다. 속단은 금물이다. 올해로 초연 20주년을 맞은 이 작품은 오랜 세월 이어온 생명력을 무대에서 증명한다. 극본을 쓰고 연출한 김광림은 1996년 대학로 문예회관에서의 초연을 이렇게 기억한다. “첫 공연이 끝났을 때 무대와 객석이 너무 뜨거워서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이 연극은 일단 재밌다. 김 연출은 극본을 쓰면서 연우무대단원들과 사건을 꼼꼼히 조사했다. 성실한 취재 덕분에 극본의 완성도가 높다. 또 사건의 뼈대는 어둡고 긴박하지만 수시로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김 연출의 말투는 은은히 정감 있고 익살스러운데, 이런 특징이 극에 녹아 있다. 연쇄 살인사건을 통해 사회를 들여다보는 근원적 문제의식 역시 작품의 깊이를 더한다.
이번 무대에 서는 쟁쟁한 배우들도 놓치기 아쉽다. 공연은 OB, YB팀 두 버전으로 나눠 진행된다. OB팀에는 유연수, 이대하, 김뢰하, 권해효 등 초연 멤버들이 합류한다. 연출은 10년 만에 김광림이 담당한다. 이에 맞선 YB팀은 지난 10년간 함께한 배우들로 구성됐다. 연출은 변정주가 맡는다. 두 팀의 대사 역시 조금씩 다르다. 각 팀은 연습을 진행하며 서로 머리를 맞대고 대사를 조금씩 수정했다.
무대를 지배하는 색상은 흑보랏빛이다. 언뜻 보면 검정 같지만, 조명이 드리우면 짙고 깊은 보랏빛이 드러난다. 흑보라색은 어두운 비밀을 감춘 이 뮤지컬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원작은 영국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가 1938년 쓴 미스터리 소설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1940년 동명 영화로 만들었다.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미하엘 쿤체와 실베스터 르베이가 4년간에 걸쳐 뮤지컬로 만들어 2006년 오스트리아에서 초연했다.
1930년대 영국 신사 막심 드 윈터와 ‘나’는 휴양지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다. 막심은 부인 레베카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크게 상심한 채 지내왔다. 결혼한 두 사람은 막심의 저택으로 돌아온다. 주변인들은 ‘나’의 평범하고 수수한 모습에 기막혀 한다. 완벽한 여성인 레베카의 자리를 ‘저런 여자’가 대신할 수 없다고 수군댄다. 집사 댄버스 부인은 위엄에 찬 태도로 ‘나’를 무시한다. 댄버스는 비중이 적지만 극을 압도한다. 배를 가라앉히는 무거운 짐처럼, 그녀는 무대에 어두운 기운을 더한다. ‘나’의 소외감은 점점 커져간다. 레베카의 죽음을 둘러싸고 석연치 않은 말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보고 있노라면 하나둘 궁금증이 인다. 레베카는 무슨 이유로 숨졌는가, 저 석연치 않은 반응은 뭘까.
원작의 서사는 극을 탄탄하게 받친다. 다만 뮤지컬이란 형식에 담기다 보니 심리 스릴러보다 쇼적인 화려함이 더 부각된다. 장르의 한계로 댄버스의 극단적 심리가 세밀하게 설명되지 않는 점은 아쉽다.
제작사 EMK는 자신들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풀어 말하면, 풍성한 볼거리와 수준 높은 가창으로 지루할 틈 없이 세련된 작품을 빚었다. 특히 대형 무대와 음악으로 극의 리듬을 탄력 있게 조절하는 솜씨가 돋보인다. 댄버스가 ‘나’를 자살하도록 유도할 때 거친 바람을 맞으며 발코니가 회전하는 장면은 극의 백미다. 우아한 드레스의 가면 무도회, 앙상블의 절도 있는 군무, 현란한 무대 전환이 눈을 즐겁게 한다. 댄버스는 신영숙, 차지연, 장은아 세 명이 연기한다. 막심은 류정한, 민영기, 엄기준, 송창의가 맡는다.
글 송은아 세계일보 문화부 기자
사진 제공 프로스랩, EMK
* 이 글은 「문화+서울」 2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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