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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문화재단 May 13. 2016

‘불행’의 패치워크를 잇다.

남산예술센터 2016 시즌 프로그램 주제기획전 <귀.국.전(歸國展)> '

귀.국.전. 첫날, 첫 극인 ‘불행’을 보기 위해 남산예술센터 로비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티켓과 함께 받은 공연 안내서만으로도 일반 연극과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이 인다. 객석으로 통하는 계단은 안내 팻말이 막고 있다. 그렇다면 입장은 어디로 하는가. 안내에 따라 모여 있던 이들은 극장 밖으로 나가 긴 대열을 형성한다. 저물어 어두워진 바깥세상은 또 다른 커다란 무대이다. 헬 조선이란 무대에 머물던 이들은 그보다는 작은 어둠에 쌓인 ‘불행’이란 공간으로 이동한다. 상층에서 무대를 내려 보는 형식의 관극이 아닌 무대 안으로 곧장 들이닥치는 식으로 관극을 시작한다. 입장과 함께 모든 관객은 또 다른 배우가 되어 무대에 세워진다.


입장권과 공연 안내서



보여주며 말하기 vs 말하며 보여주기 


예술적 표현법을 크게 둘로 나누면 말하기(telling)와 보여주기(showing)가 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소통할 때 언어적 표현과 비언어적 표현을 쓴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언어, 즉 말하기를 선호한다. 이해하기 쉽고 명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말로 다 드러날 수 있는 것일까. 말로써 모든 감정을 드러낼 수 없기에  사람들은 상대의 표정과 몸짓, 분위기 등에 신경을 쓰며 눈치를 살핀다. 비언어적 표현을 읽어내려는 것이다. 실제로 약 70~80%의 의사소통은 비언어적 표현을 통해 행해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극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극은 이야기 전개와 대사를 통해 주제를 보여준다. 어떤 극은 단순히 보여주는 행위를 통해 말한다. 대부분은 그 둘이 섞여 있지만, 비율은 천차만별이다. ‘불행’에 대해 말하자면 이 극은 스토리가 없다. 들리는 말들은 단음절의 맥락 없는 외침이나 고함 혹은 비명, 울음이고 그나마 뜻이 있는 말은 배경음악의 가사 정도이다. ‘말하며 보여주기’보다 ‘보여주며 말하는’ 형식을 극단적으로 취사선택한 형식의 극이다. 때로는 침묵이 더 큰 울림을 가지듯 이 극 역시 말 없는 외침으로 더 적나라한 불행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무대로 들이닥친 관객이 처음으로 보게 되는 장면은 말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중요하다. 배경은 어둡고 분절되고 높이 쌓여 있거나 막혀 있다. 자재인지 쓰레기인지 무대장치인지 모를 것들이 어지럽게 공통분모 없이 흩어져 있다. 그 사이사이 유일한 공통점은 동물 탈을 쓴 배우들이 정지 영상처럼 멈춰 있는 모습이다. 원숭이, 오랑우탄, 양, 호랑이, 사슴, 멧돼지, 닭, 말, 돼지 등의 얼굴이 아래층 무대부터 윗층의 객석까지 곳곳에 있다. 흡사 조지오웰의 동물농장 같다. 처음에는 배우와 관객, 그 둘을 구분하려는 의도로 배우가 동물 탈을 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보다 이 극 자체가 우화, 풍자극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시도는 아니었을까 싶다.


동물 탈을 쓴 배우


무대와 무대장치는 불행의 구조를 보여준다. 남산예술센터라는 장소의 특성을 염두에 두고 창작을 했다는 연출의 말에 이곳에서 ‘불행’이 상연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는다. 고대 민주주의의 원형인 아고라(원형광장) 같은 구조이지만 계단식 극장이라는 형태는 만민은 평등하다면서도 상류층을 추구하는 현실 세태를 반영하는 듯하다.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신자본주의체제의 지배를 받는 사회의 모습을 무대 구조만으로 보여준다. 중앙의 탑처럼 쌓여 있는 구조물 위 커다란 빈 의자 하나 역시 의미심장하다. 무대 주변에 성곽처럼 쌓여 있지만 곧 무너질 듯한 박스는 아슬아슬한 개인주의 같고 박스 사이에 설치된 비디오카메라는 관음증적이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번쩍이고 화려한 원색의 옷과 배우에게서 풍기는 짙은 향수는 물질주의와 향락추구를, 폐타이어와 빈 페트병, 일회용 컵은 환경오염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이런 불행의 구조 속에서 정지해 있던 동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그들이 펼치는 불행을 살펴보자.


탑 구조물과 배우들, 무대 정경 일부



옆에 있기(공감), 위에서 보기(관망), 거울로 비추기(반영) 


관객은 마음가는대로 배우와 장면을 취사선택할 수 있다. 바로 앞에 있던 원숭이를 쫓다가 양머리에게 마음을 뺏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불행을 대하는 방식도 유사하지 않나. 어떤 사건이 뉴스에 터진다. 잠시 와글와글 관심이 쏠린다. 더 큰 사건이 기사화된다. 이전의 뉴스는 어느새 잊힌다. 불행을 관극하면서 우리는 많은 불행한 모습을 만난다. 성 소수자, 은둔형 외톨이, 게임중독자, 미친 사람, 바에서 혼자 술 마시는 사람, 담배만 피는 사람, 다이어트와 폭식을 반복하는 사람, 노숙자, 폐지 수집자, 실업자, 갑의 횡포에 맞고 있는 사람, 실종자를 찾는 이, 성도착자, 성매매자, 영업하다 싸우는 이, 학생, 길에서 부딪혔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을 행하는 장면 등등.


그 많은 불행들을 관찰하다 보면 어느 순간 탈을 쓰고 있던 배우들이 탈을 벗고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습이 된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다는 애절한 노래가 흐르자 모든 배우들이 슬피 울기 시작한다. 싸우던 이도, 전단지를 돌리며 누군가를 찾던 이도, 물건을 팔던 이도, 자신만의 동작에 몰두해 있던 이도 모두 자신의 슬픔을 이기지 못해 옆 사람을 찾는다. 옆에 있던 관객은 비로소 그들의 불행에 무언가 행동을 취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같이 울어줄지, 토닥여 줄지, 가만히 지켜볼지, 의아해하며 멀찍이 떨어질지 자신도 모르게 결정을 하는 순간 관객은 이미 또 다른 배우가 된다.


불행 안에만 머물다 보니 피곤해진다. 배우들을 따라다니기도 지친다. 몇몇은 객석으로 올라가 전체적인 흐름을 찾고자 한다. 앉아서 관망하기도 한다. 물론 배우들 역시 무대에만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객석으로 올라간다고 무대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다. 3층 객석 한구석에 텐트가 있다. 그 옆 길게 늘어진 커튼 아래 반사광을 내는 물체가 있다. 8조각으로 나뉘어 있는 거울 같은 것이 보인다. 불행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멀찍이서 보니 아픔과 소란스러움이 잘 보이지 않는다. 거울에 반사되는 형체가 어른거리는 것이 저 불행은 내게는 닥치지 않는 먼 곳의 이야기 같다.


초록 정장 차림의 말쑥한 여자가 객석으로 올라와 마이크에 대고 말을 한다. 접속사와 수식어만 난무하는 이야기에는 요점이 없고 의미파악 자체가 불가능하다. 실종자를 찾는 전단지 속 문장 역시 잘게 끊겨 전후 맥락을 알 수가 없다. 배경음악은 오페라, 애국가에서 팝, 샹송, 엔카로 바뀌다가 그마저 노랫말도 중간중간 끊겨 들린다. 정장을 입은 여자가 사라진 공간에 줄타기를 하려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가 줄타기를 하려는 듯, 탑 구조물 위 의자를 향해 가려고 하자 급작스럽게 조명이 꺼지고 경쾌한 댄스 음악과 현란한 조명이 등장한다. 모든 배우들이 같은 율동을 하기 시작한다.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흥겹고 즐거워 보이기까지 하다.


흥겨웠던 순간도 잠시, 장총을 든 여자가 탑 구조물 위 의자에 올라가 있다. 조금 전 2층 객석에서 줄타기를 시도했던 남자는 한 여자와 함께 무대로 내려간다. 총소리와 함께 남자는 쓰러지고 여자는 울며 객석으로 사라진다. 동물 탈을 다시 쓴 배우들은 모두 암전된 무대에서 조명이 들어온 객석을 향해 기듯이 천천히 올라와 죽은 듯이 쓰러진다. 불행을 무대 곁에서 지켜봤던 이도 객석에서 바라보던 이도 불행의 파급효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극장 전체에 스며있는 불행의 기운을 박수 소리가 덮었다.



내‘큰’불행과 네‘사소한’불운

 

한 관객(이명재, 여, 37)은 관극 후 소감을 묻는 말에 배우보다 불행을 바라보는 관객의 반응을 관찰하는 것이 더 흥미로웠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극 중간에 배우들이 울며 사람들을 안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순간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제 옆에 한 배우가 관객을 안고 울었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은 안겨서 꼼짝도 안 하고 표정이 굳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그 사람도 배우인가 했는데 아니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며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불행한 사건을 대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어떤 사람은 같이 울어주거나 안아주고 누구는 미친 사람 보듯 보거나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고요. 사람들은 내 불행은 불행이라고 크게 인식하고 다른 사람의 불행은 그저 행이 아닐 뿐이라고 작게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극 중 서로 안아주는 모습


이 말을 들으며 마침 그 날 들은 사건 하나가 연상됐다. 전철 안에서 노약자석에 앉은 임산부를 보고 한 노인이 욕을 하며 일어나라는 식으로 얘기했을 때 아무도 나서지 않아 지인이 임산부 편을 들었다고 한다. 잠시 주춤하다가 ‘너도 빨갱이냐!’며 말도 안 되는 억지소리를 하는 그분에게 이번에는 옆자리 청년이 같이 나서서 말싸움을 하다가 몸싸움이 되어 중간에 낀 지인은 그 싸움을 말리는 입장이 됐다고 한다. 다음 역에서 전철이 정차하고 싸우던 둘은 같이 전철 밖으로 나가고 싸움을 말리다가 다치기까지 한 지인은 전철 안의 차가운 시선에 두 번 상처 입었다고 한다. 그 시선들은 ‘뭐하러 나서서 일을 벌이냐?’는 무언의 질책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불행을 나눠서 생각하게 된 거 같다. 내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불행은 막아야 하지만 타인의 불행에 끼어드는 것은 오히려 내 불행을 자초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 불행과 네 불행은 다르다는 생각.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개인주의와 끊어지고 분열된 말로 단절된 대화는 초록 정장 여자의 말과 실종자 전단지처럼 타인의 불행을 이해할 수 없도록 한다. 바로 여기에 관극을 할 이유가 있다.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극을 통해, 극 중 관객의 모습 속에 자신을 거울처럼 반영함으로 타인의 불행을 스쳐 갔던 본인을 돌이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불행의 패치워크를 잇기 


극장을 나서며 무대 위 남겨진 소품을 바라봤다. 실종자 전단지, 동물 탈, 벗겨진 구두 두 짝 모두 불행의 흔적 같았다. 타인의 불행을 그저 바라만 보면 앞선 지인의 사건처럼 상처만 남기게 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무대에서처럼 서로 안아줄 수 있다면 서로의 불행은 위안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무대 위에서 불행한 사건을 따라가던 관객은 불행을 겪는 배우에게 단지 바늘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불행과 네 불행을 연결시키는 공감이 머문다면 상처를 주면서도 꿰매고 이을 수 있는 실 달린 바늘일 수도 있지 않을까. 불행의 조각들이 이어지면 위로와 공감의 조각보로 빛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은 수많은 상처를 숨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대하다. 그러므로 사랑을, 상처가 상처로 남을 수 있게 하는 에너지인 사랑을 우리는 더 많이 더 깊이 더 뜨겁게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 불행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_ 김민정, 연출의 글 중



연출이 말한 사랑이란 불행을 지나 완성되는 사랑. 혹은 감히 희망을 말할 수 없음에도, 조각보란 작품(work)을 만들 수 없을지라도 그 조각들 사이를 거닌(walk) 흔적만으로 서로에게 거친 위안이라도 줄 수는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공연 뒷모습- 벗겨진 동물 탈과 구두


귀.국.전.의 다른 두 작품 역시 우리 사회의 불행을 다루었다. ‘불행’에서 파편적으로 보여진 불행이 이경성 연출의‘그녀를 말해요’에서는 세월호 참사로, 구자혜 연출의 ‘commercial, definitely-마카다미아, 검열, 사과 그리고 맨스플레인'에서는 한국사회의 갑을, 권력, 남녀관계로 구체화 했다. 아픔과 상처를 입은 서로를 극을 통해 만났다. 우리 마음에 공감이라는 실을 달고 다음 조각보를 꿰어 냈다.


귀.국.전. 현수막



글·사진 박수진서울문화재단 시민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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