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난다 박미옥 선생님 비롯 동반 수련자들과 함께 하루 3개의 물건을 비우고 3개의 기쁨을 찾는 공간 살림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중 내 삶의 군더더기를 비우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 집안의 쓰레기들과 면담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오늘은 그 아홉 번째 시간이다.
포털 사이트에 일기장이라고 검색하면 다음과 같이 창이 뜬다.품명: 일기장
가격: 1200~
스펙: 스프링 노트, 양장 노트, 캐릭터 노트 등 다양
개인면담 개물(物) 면담: 쓰레기의 변명
2013년 12월 19일 (목)
눈이 내렸다. 쓸쓸하고 차가운 겨울이 좀 더 아름다워졌다.
하얀 눈의 결정체들이 모여 이불솜처럼 두툼한 두께감으로 세상을 덮었다. 따뜻했다.
세상의 누추함을 덮어주는 그 자비로움에 감사했다.
괜히 슬펐다. 가끔 나는 이 슬픔 속에 틀어박혀 있는 것을 좋아한다. 피학적인 나의 어떤 부분 때문인가.
나는 나도 모르게 어떤 감정이 치솟아 오르면 , 추운 겨울 공기가 맴도는 방안에 깔린 이불 안이 유일한 안식처 인양 꼼짝없이 그 안에 미동 없이, 생각 없이 누워 있는 것이다.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이유 없이 울고 싶은 때는 핑곗거리를 만든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아빠가 버린 중2가 되는 것이다.
아빠 없이 외로웠던, 아니 아빠가 날 사랑하지 않아 비참했던 내가 되면 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고 그때부터는 마음껏 슬퍼해도 된다. 울어도 된다.
황홀하여라 깊은 슬픔은
덩그러니 내팽개쳐진 곳에
슬픔이 차오르면
숲 속 밤 부엉이 소리
꼬리를 살랑대는 물고기 소리
예민한 귀를 쫑긋거리는 청설모 소리
은은하게 간지럽게 들린다.
슬픔이 환한 보름달처럼 밤을 채우면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깊은 슬픔은 결코 슬프지 않다.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던 몇 권의 일기장.1. 의견
일주일 전 여동생의 결혼식이 있었다. 여동생은 반짝이는 하얀색 입고 아이보리색 벨벳 의자에 앉아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이 맞고 있었다.
나는 신부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했고 동생은 놀란 듯 눈을 치켜뜨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회색 양복을 차려입은 아빠는 신부에게 "딸 예쁘다"며 큰소리 내어 좌중을 웃게 하였고, 나도 소리 내어 웃었다.
한복을 입은 아빠의 아내는 결혼식에 와줘서 고맙다며 속눈썹을 붙인 눈을 깜빡이며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나는 당연히 와야죠라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아빠는 20여 년 전 사랑을 따라 내 인생에서 자취를 감췄고 다른 성을 가진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날은 그 아이 중 그 첫째 아이, 내 여동생의 결혼식 날이었다.
나는 언젠가 남편이 바람이 나서 나를 떠나기를 바랐다. 지독하고 잔인하게 나를 짓밟고, 연인이 주는 환희와 구원을 향해 떠나기를.
남겨진 나는 결코 남편의 배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평생을 허우적거리기를.
그리하여 아빠가 내 인생에서 내 엄마의 인생을 보기를.
당신이 버린 여자의 절망과 최후를, 당신이 낳은 딸을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당신이 얼마나 끔찍한 사람이었는지를 증명하고 싶었다.
아빠는 여동생의 결혼식 날, 내 볼을 만지면서 왜 이리 야위었냐 물었다. 양복을 입은 아빠 또한 나처럼 야위었고 작았다.
내 앞에 선 아빠와 아빠의 아내는 미워하기에는 너무 늙어있었고, 나는 그들을 원망하기에 너무 커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마음이 스쳤다.
'당신들은 두 가정을 파탄했고 가족이라 부르던 이들을 아프게 했으면서, 당신의 자식들이 결혼 서약의 맹세를 지킬 것을 바라는 게 가당찮은가?, 당신들이 그런 것처럼 누군가가 당신 자식의 가정을 흔들어버린다면, 그제야 당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속죄할까?
그리고 나는 무척 슬펐다.
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아직도 그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 속에 묶여있는 내가, 죄 없는 그들의 아이들에게 저주의 말을 중얼거리는 내가 너무나 아프고 절망스러웠다.
나는 그날 집으로 돌아와 그리 다정하진 않지만, 진심을 담은 문자를 여동생에게 보냈다.
"그동안 힘들었지? 따뜻한 가정 꾸리며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어린 나는 아빠를 잃어 억울하고 슬펐지만, 나보다 더 어렸던 여동생은 새아버지 얻어 아프고 불편했으리라.
여동생에겐 부모의 죄에서 자유로워져 자신이 꾸린 가정에서 충분히 행복하고 사랑을 누릴 자격이 있다. 내가 지금 그런 것처럼.
나는 첫사랑이 떠난 후 꽤 오랫동안 일기를 썼다. 애인에게 버림받음으로써, 내면 깊은 곳에 가라앉아 웅크리던 슬픔이 떠올랐는데, 바로 아빠에게 버림받은 나였다.
일기에는 아빠와 애인을 원망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일기에는 미친년처럼 사랑을 했다가 미워하기를 반복하는 내가 있었다. 그때 썼던 일기 대부분은 버렸지만, 어떤 아픔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아프고 슬픈 나를 떠나보내려 한다.
나는 아픔의 기록들을 비우면서, 젊음이 가시고 꾸깃꾸깃해진 두 부부를 그만 용서하고 싶다.
나는 용서를 통해 원망과 미움에서 해방되어, 나는 모르게 터져 나오는 축복의 노랫소리를 흥얼거리고 싶다.
2. 물건과 관련된 감정
우울함, 고통스러움, 부끄러움, 비관적임
3. 물건과 관련된 욕구
나를 아프게 한 사람들을 미워하고 싶은 욕구
내가 실망스러울 때,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싶은 욕구
4. 비우려는 구체적인 이유
오랜 세월 미원하고 원망하는 마음은 나를 더 아프게 한다.
일기에 기록된 아픔아, 슬픔아
그동안 나를 위로해주어서 고마웠어!
나는 이제 그만 슬퍼하고 아프고 싶어.
나는 강한 어른이 되었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거든.
나는 이제 그들의 아픔도 연민할만한 힘이 생겼거든.
정말 고마웠어!
결론: 너는 쓰레기로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