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와의 면담: 열 번째

일어 사전, 일어 책: 부채의식

by 열매 맺는 기쁨

나는 아난다 박미옥 선생님 비롯 동반 수련자들과 함께 하루 3개의 물건을 비우고 3개의 기쁨을 찾는 공간 살림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중 내 삶의 군더더기를 비우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 집안의 쓰레기들과 면담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오늘은 그 열 번째 시간이다.


포털사이트에서 일어 사전을 검색해 봤다.

품명: 엣센스 일어사전 제2 개정판

발행연도: 2001년

가격; 3만 원 초반

개인면담 개물(物) 면담: 쓰레기의 변명


안녕하세요.! 조는 이 댁에서 가장 오래된 물건이므니다. 에~ 20여 년 전에 중학교를 다니는 주인은 노또랑 연필을 옆에 두고 저를 뒤적거리며 제법 공부하는 티를 내더니, 니혼고는 무리라 생각했는지, 이제 통 얼굴 마주 볼 일이 없으므니다. 엣또~요즘은 핸드폰으로 단어도 찾고 칸지도 찾는다던데... 제가 꼭 요기에 있어야 하냐고 물으신다면,

"それについて考えたことがなくてよく分かりません"

모랄까, 전자책 있다고 종이책 안 삽니까? 종이책은 종이책 나름대로 매력이 있지 않스므니까?

9월에 찍은 사진; 오랫동안 비울지 말지 고민한 흔적



1. 의견


나는 무려 20여 년 전에 시작한 일어 공부를 아직도 끝마치지 못했다. 여기서 끝마치지 못했다는 것은, 개인적인 견해로, 한글 자막 없이 일본 드라마를 보거나 손짓 발짓하지 않고는 일본을 여행할 언어 실력이 안 된다는 뜻이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방과 후 수업으로 들었던 일본어가 재미있어서, 엄마에게 일어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라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학원 선생님은 젊은 시절 일본에서 가난한 알바를 하며, 몸으로 일본 사회에 부대껴 어를 체득한 분이었는데 나는 제대로 밥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보이는 선생님의 호리호리한 몸과 어린 남자아이를 키우는 싱글대디라는 것 때문에 그가 안쓰러워 '이게 아닌데'싶은 생각이 들 때에도 학원을 일찍이 그만두지 못했다.


학원의 언니와 오빠들은 대게 덕후로서 일본 문화에 빠삭했고, 대게 좋아하는 일본 배우나 가수, 또는 캐릭터 한 명쯤은 있었는데, 나는 그런 것도 없이 일어학원을 나갔다.

그럼에도 내가 그 학원을 그렇게 오래 다닐 수 있었던 것은 거기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H언니 덕분이었다.


H언니는 나보다 8살쯤 많았는데, 전문대를 졸업하고 레코드사에서 알바를 하다가, 인생 이러다가 쫑나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되어, 취업을 염두에 두고 일어학원을 다니던 중이었다. 언니는 기무라 타쿠야의 팬이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일어를 배우러 학원을 다닌 것이 아니라 H 언니를 만나러 학원을 다녔다.

나는 당시 또래 친구들이 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H 언니랑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언니가 내 또래 아이들보다 더 유치할 때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H언니와 있으면 내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하교를 하고 학원가는 날이면 언니가 아르바이트하는 레코드점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함께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고, 함께 버스를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참 즐거웠다.


나는 그 학원에서 막내로 꽤 살뜰히 예쁨 받았는다. 여기서 예쁨이란 선생님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못할 때 ' 괜찮아 괜찮아, 막내잖아'라는 공동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어물쩡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나는 나의 일어 실력에 상관없이 학원을 오래 다녔다는 이유로 학원에서 가장 상급자 반에 속했다, 그곳은 일어를 전공할 예정이거나, 일본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거나, 일본어 1급 자격증을 따서 생계를 유지할 사람들이 있는 반이었다.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바로 이것!

"それについて考えたことがなくてよく分かりません"

한국어로 해석하면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라는 뜻이다.


그래도 서당개 삼 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나도 잘하는 언니, 오빠들 틈에 끼여서 어영부영 수업 진도를 따라가다 보니 기초 수준은 면해서 일어 시험 준비와 원서 읽기를 함께 하게 되었다. 듣기랑 회화는 어찌어찌하겠는데, 원서 읽기 수업은 도저히 쫓아갈 수가 없었다. 그때 내가 배웠던 책은 '오체불만족' 일어판으로 한 문장에 모르는 한자가 3개 이상씩 나와서 조사와 어미, 형용사 정도만 읽을 수 있었던 나는 이제 일어를 포기하던지 한자를 공부하던지 선택을 해야겠다는 압박을 느꼈다.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이제 진지하게 대학입시를 준비해야지, 일어 공부는 대학 가서 하자'라는 핑계를 대며 일어를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한자를 공부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을 취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므로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언젠가 '시간이 되면, 마음의 여유가 되면' 일본어를 마스터하리라는 마음을 한편에 품으며 성실하지 않은 삶에 대한 부채 의식을 해결하고자 했. 하지만 나는 언어에 무심했고, 이 언어 배우는 나에 관대했다. 이것 말고도 내게는 해야 할 과업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취업에도, 취미에도 별 쓸모가 없는 일어는 후순위에 밀려났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한 뒤에도 나는 일어를 대충, 마음먹으면 한두 달 정도 공부하다 포기했다. 그럼에도 내가 아직도 일어 사전과 몇몇 책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언젠가 내가 '마음만 먹으면', ' 제대로 한자 공부만 하면' 일어를 자유자재로, 원어민급으로 쓸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체 언제 마음을 굳게 먹어서 일어를 술술 말할 수 있도록 공부를 하게 될까. 나는 왜 일어를 공부하고 싶은 걸까? 진실로 나에게 물어보니, 나에게는 절실한 마음이 없다. 일어를 공부해서 얻고 싶은 것도 누리고 싶은 것도 없다. 나는 부채의식, 그 시절을 성실히 살아내지 못한 나에 대한 빚 때문에 이것을 아직도 이고 지고 살고 있다.


나는 이제 어영부영 거리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선택을 해야 할 때다.

일어 공부를 제대로 하겠는가, 일어를 포기하겠는가? 이 물음에 내 속의 희열이 답할 것이다.


2. 물건의 대한 감정

갑갑함, 민망함, 심드렁함, 질림, 고민스러움


3. 물건에 대한 욕구

'언젠가' 공부할 때 요긴하게 쓰이리라는 기대


4. 비우려는 구체적인 이유

책장을 차지하고 있다.

공부 안 하고 있고 안 하고 싶은데, 해야 할 것 같아서 죄책감이 느껴지니다.

당분간 일어 공부할 예정이 없다.

사전이 없어도, 스마트 폰으로 쉽게 일어 단어를 찾을 수 있다.


일본어 책들아, 일본어 사전아 미안하다.

이제 이별할 때가 왔다.

일본 문화를 좋아하고 즐기는 좋은 주인 꼭 만나거라~

사요나라! お気をつけて!


결론: 너는 쓰레기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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