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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끄저김 Sep 15. 2022

EP 1. 어쩌다 보니 Book Bar 사장

부제 : 천천히 망해 볼 생각입니다.

#1. 무작정 퇴사

초등학교 6년을 제외하면, 어떤 조직에도 6년 이상 몸 담아본 적이 없던 내가 7년 가까이 재직한 회사를 퇴사하는 것은 생각보다는 다소 충동적이었다.


마흔에 가까워질수록, 커리어가 쌓일수록,

그와 함께 정비례하는 나의 고민이 2년 가까이 이어졌고,

고인물이 되어 버린지도 이미 오래긴 했지만

변화를 일단은 줘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에 퇴사를 결심했다.

(물론, 자세한 내막까지 여기서 밝힐 수는 없지만 대략 큰 맥락만 보면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퇴사 후, (내 예상보다는) 빠르게 이직하게 되면서,

최소한의 refresh 정도를 기대했는데.. 현타가 오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것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는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예상보다는 빨랐다)


#2. 계속 되묻게 되는 질문과 정해져 있던 답의 굴레

“어떤 회사를 가도 결과는 같지 않을까”

“내가 회사를 계속 다니고 싶다고 정년까지 다닐 수도 없는데…”

“결국 나오게 될 회사면… 그다음은 결국 치킨집인가?”(치킨집에 대한 비하가 아니라.. 대명사 같은 의미로 사용한 것..ㅠ)


내 주변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저런 고민 안 해본 사람들은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회사를 열심히 다니는 이유는

회사를 그만둘 만큼 뭔가를 해볼 만한 것이 없거나

용기가 없거나

둘 중 하나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저 이유들이 나한테 적용되는가? 그것도 아니다.

일단 용기가 없었던 것은 맞지만, 혹여나 망하면? 더 솔직하게 말하면… 정말 무조건 망할 것 같은 아이템만 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또 조금 더 생각해보면 내가 용기를 내지 못할 이유 또한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내겐 책임져야 할 처자식이 있지도 않고

(장담할 수 있는 일은 없다지만, 내 미래에 결혼이라는 그림은 없다는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부모님 두 분의 생계를 내가 책임지고 있지도 않다.

(기껏해야 명절, 생신, 어버이날에 드리는 많지도 않은 용돈이 전부이니..)


결국, 난 당분간은 망해도 되는 사람이었다.


#3. 결정을 했으면, 남은 건 행동뿐

결정을 하면, 평소에도 실행은 빨랐던 편이고

혹시라도 맘이 약해지지 않게, 여기저기 내 결심을 소문내고 다니기 시작했다.


농담처럼 장래희망이 백수, 독거노인이라는 말을 하고 다니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독거노인 정도는 가능해 보인다) 잘 알고 있었기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봤을 때, 떠오르는 것은 책방을 운영해보는 것이었다.


다만, 책을 파는 곳이 아닌 책을 읽는 공간으로.

흔히 이런 공간으로 북카페를 떠올리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도 같은 생각으로 북카페를 자주 방문한 편이지만

만족스러운 북카페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선, 이름만 북카페이고 책이 좀 많은 일반 카페와 다를 바 없는 공간이 많았고(기본적으로 대화가 가능한 카페 공간의 특성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대화를 하지 못하게 하는 북카페도 물론 있었지만, 도서관과 다를 바 없는 딱딱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마찬가지로 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책바'라는 공간을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집과 거리가 멀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술을 즐기지도 못하는 개인적 성향 때문에) 가본 적이 없었다가 한 번 마음먹고 찾아가게 됐는데, 매우 만족스러운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


일렬로 앉는 바 테이블에 앉았고, 그다지 의자가 편하지도 자리가 편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로 설명하기 힘든 안락함이 느껴졌다. 굳이 흠을 찾는다면, 계속된 음료 주문에 칵테일 제조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과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이긴 하지만) 가사가 나오는 음악이 계속 흘러나왔다는 점이 책 읽는데 약간의 방해가 된다는 점 정도?


#4. 뭘 다르게 만들 수 있을까?

의외로 책바는 많았고, (마케터, 광고대행사 직원으로 모든 커리어를 지내온 직업병 때문인지)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차별화 포인트부터 찾게 되었다.


우선은 쉽게 접근했다. 기존 책바의 장점은 모두 취하되, 내가 느낀 단점은 제거하는 것으로.


매장 내 불가피한 백색소음은 제외하고, 내가 의도한 음악(가사가 없는 연주음악 위주)만 흘러나오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고, 대부분 개인 서재 느낌이 날 수 있는 가구로 나만의 공간에서 책을 읽고 술을 마시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대략적인 큰 그림을 그린 뒤에는 매장 위치에 대한 고민에 들어갔다.

자영업을 해본 경험도 없는 나였지만, 그래도 대략 아래의 조건들은 충족시켜야 하지 않을까 하는 판단은 있었다.   


1) 유동인구가 많은 곳인가?

2) 내가 잘 아는 곳인가? 

3) 접근성이 좋은 곳인가? 

4) 지인 장사라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5) 내가 생각하는 서비스의 타겟이 많이 있는 곳인가?


서울, 그중에서도 강남, 홍대, 연희동 등과 같이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서 시작하는 것은 금전적인 문제가 가장 큰 문제이기도 했지만, 굳이 그렇게 복잡한 곳에 위치하는 매장을 운영하고 싶지도 않았다.


우선, 내가 판교에서 직장생활을 한 뒤로는 서울을 잘 모른다. 그리고 (나이 탓이라도 하고 싶지만) 원래도 그랬지만,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 탓에 복잡하지 않은 곳에 위치하기를 원했다.


그렇다고, 사람이 없는 곳이야 비용적인 측면에서 세이브될 수 있을지도 몰라도, 결국 수익도 낮아질 수밖에 없기 마련인데, ‘판교’가 어느 정도 내가 원하는 조건을 충족시키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 약 7년간 판교에서 직장생활을 한 덕분에, 나름 판교에 대한 이해가 있는 편이었다. > 2번 고민은 어느 정도 해결됐다.


(2) 최근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가 많아지면서, 판교의 유동인구가 줄어들긴 했지만, 평소에는 점심시간에만 해도 (심지어 재택근무가 많아진 지금까지도) 카페는 사람으로 넘쳐난다. > 지금은 아니지만, 1번 고민 역시 해결할 수 있는 잠재력은 있다.


(3) 판교역에서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자차 출근하는 인구도 많고, 그만큼 버스 출퇴근 인구도 많은 곳이 판교다. 그래서 판교역보다는 주변에 회사가 많은 곳(넥슨, NC소프트, 카카오, 네오위즈, NHN 등)의 접근성이 좋은 곳을 택했다. > 3번 고민도 어느 정도 해결 


(4) 7년여간 있던 곳인 만큼 지인들도 많이 이직하긴 했지만, 결국엔 내 지인들이 가장 많은 곳 역시 판교였다. > 4번 문제 해결


(5) 트레바리 서비스를 2년째 이용하면서 느낀 점이, 트레바리에서 만난 사람들 중 IT서비스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가장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렇다 보니 판교에서 일하는 사람들 역시 많다는 것을 알았다. > 확실하진 않지만, 5번에 대한 가능성도 발견


매년 1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 10명 중 4명이다. 와 같은 타이틀의 기사를 많이 접한 만큼, 독서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을 뉴스를 통해서는 체감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독서인구가 사라질 일은 없다고 생각했고 반대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로열티는 꽤 높다고 생각했다.


결국, 내가 만들고 싶은 공간에 오는 사람들은 절대 오지 않을 사람들과 한 번쯤은 궁금해서 올 사람들로 확실히 구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고, 한 번쯤은 궁금해서 올 사람들이 좋아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내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5. 우선 내가 좋아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부터

마케터로 일하면서, 타겟분석이라는 말을 지겹게 듣고, 말해왔지만

‘타겟’이라는 것 자체가 불명확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고, 유니콘처럼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불분명한 타겟이 아니라, 우선 ‘나’를 꼬실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1차 목표였다.

내가 대중적인 타겟이 아니라면.. 망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나 조차도 꼬시지 못하는 공간이면, 애초에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우선, 앞에서도 말했지만

난 책을 읽을 때, 어느 정도의 소음은 용납하지만 중간중간 발생하는 다소 튀는 소음은 싫었다.

그래서 커피머신 특유의 소리가 커피 주문마다 들려오는 것도 용납하고 싶지 않았고, 셰이킹이 필요한 칵테일 음료도 고려하지 않게 되었다. 칵테일 음료의 마진이 높다고도 많이들 이야기했지만, 처음부터 너무 매출이나 수익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커피나 칵테일이 맛있어서 찾아오는 공간이 아니라, 그냥 공간 자체가 주는 따뜻함이나 편안함으로 승부하고 싶었다.

편안하게 와서 조용히 책을 읽다 가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무엇보다 내가 그런 공간을 집에 만들고 싶었지만, 그러기에 내 집은 너무 좁다..ㅠ)


사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너무 부끄러운 수준이다.

나 같은 사람은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고

심지어 마케팅 일을 하다가

퇴사하고 책방, 책바, 서점, 북카페 등을 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넘쳐(나는 것처럼 보일만큼) 났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나에 비하면

책에 미쳐있다고 할 만큼 책을 많이 읽고 책에 대한 지식도 뛰어났다.


일단, 난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사람이다.

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이다.


굳이 말하자면, 책을 사는 것은 좋아하는 편이다.

다만, 공간의 한계나 읽지도 못할 책을 사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자리한 나머지 책을 많이 산다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으로 가득한 공간을 소유하고 싶었고

나만의 서재를 갖고 싶었다.


그렇다고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서재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고

서재를 만들기 위해 집을 넓히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웠다.(집값이 싸고 넓은 곳으로 가려면, 수도권은 포기해야 했으니깐)


대안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공간 마련? 월세면 충분

월세를 감당할 수익은? 공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이용료 혹은 술값으로 충당


책이 있고

술이 있는

편안한 공간을 만들면

(많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나 같은 사람은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로 시작을 결심했다.


사실 난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선 맛이 없어서 싫고

술이 받지 않는 체질 탓에

맛도 없고 마신 뒤에 괴롭기만 한 술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녁 영업이 메인인데 커피를 팔기도 뭔가 애매해 보였고

커피머신 특유의 괴음이 끊이지 않는 공간 역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책 읽기에 크게 거슬리지 않는 음악만 흘러나왔으면 했고,

그 외의 소음은 백색소음에만 가깝기를 원했다.


그러려면, 술만큼 적당한 것이 없었다.

술 따르는데 소리가 나면 얼마나 나겠나.

위스키나 칵테일 혹은 티백이나 드립백 정도로만 제공할 수 있는 음료를 각자 마실만큼 주량껏 마실 수 있으면 되겠다 싶었다.


공간이 메인이지,

내가 제공하는 서비스가 메인인 공간은

그럴 능력도 자신도 없었다.


결국,

이런저런 고민 끝에, 말 그대로 작지만 소중한 나만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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