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 비누 공유 연맹 52

by 인디캣

내가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시체다. 어제 죽었고 오늘 붕 떴다. A는 나와 그녀의 장례식에 조문오지 않았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불법 체류 중이었고 출국하다가 영구 입국 금지 조치를 당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녀를 처음으로 본 것은 병원-감옥의 심리상담사 실이었다. 나는 모국의 심리상담사와 정신과 전문의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심리상담사는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그녀와 같이 앉아 있었다. 심리상담사는 그녀가 학생이며 이곳에서 실습을 하고 있다고 얘기해줬다.


정신이 나간 상태였던 내 눈에는 그녀가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사실 그 상황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여자가 그녀였기 때문이다.


나는 머릿속에 대해서 변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온갖 판타지스러운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우리의 이야기는 외우주에 대한, 공허하고 문자 의미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바깥 세계에 대한 별스러운 헛소리로 귀결됐다. 심리상담사의 영어 실력은 괜찮았으나 내 실력은 형편이 없었고 나는 서사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모든 이야기가 지리멸렬했고 나는 심리상담은 정신과적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죽고 난 후에야 살아있다는 것이 그다지 의미있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 또한 깨달았다. 죽음은 기나긴 장례식과 그 후로 이어지는 무덤 속에서의 지루한 하루하루에 불과하다. 삶은 그 반대이고, 아니 그 반대가 죽음이었나.


나는 점점 제대로 된 언어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는 기억한다. 심리상담사 실의 실습 학생이 귀여웠다는 것. 범죄자들은 심리 상담을 받기 위해 긴 줄을 만들고 있었다. 범죄자에게 심리 상담이 필요하다고 믿는 모국의 사법 체계에 경의를 표한다. 한국은 그런 것도 없다. 있나? 안 가봐서 모르겠다. 유튜브에 널린 감옥 체험기에도 심리 상담 이야기는 없다.


나는 모국의 감옥에서 한 차례 울었고 바로 심리상담소로 보내졌다. 심리상담사는 약을 처방하지 못했고 나는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여전히 잠이 잘 오지 않았고 화장실 휴지가 떨어질까봐 두려웠다. 영어를 할 줄 아느냐는 질문에는 항상 리틀이라고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내 영어 실력은 리틀에 불과했기 때문에. 중국인 간수들에게 나는 옥스퍼드식 영어만 알아듣는다고 베짱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베짱은 1인실에서 조명 스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나에 대한 타박으로 돌아왔다. 영어로 얘기했는데도 왜 못 알아듣냐며. 뭐. 영어 문제는 중국이나 한국이나 예민한 건이다. 젊을수록 영어에 능숙하지만 범죄자들은 대체적으로 영어를 못 알아듣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이제 모국에서의 일을 거의 다 잊어버렸다. 그럼에도 아침이 되면 모국의 아침이 떠오르곤 한다. 역대급 한파가 몰아닥친 모국의 겨울은 춥고 건조했다. 우리는 모두 일어나 한 줄로 서서 어제 컵에 부어넣은 차를 마셨다. 이봐. 잠자기 전에는 꼭 차를 컵에 따라 놓으라고. 왜 그래야 하지? 2인실에 가면 물이 없거든. 미결수의 생활은 기결수보다 더 낫기도 하고 낫지 않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시체였다.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또 비슷한 범죄를 저질러서 감옥에 가고 재판을 받아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미결수 신세였다. 미결수들은 감옥에 갇힌 건 분명했지만 죄가 있는지 없는지 판정을 받지 않았으므로 풀려날 가능성도 있었다. 자신이 어떤 형을 받게 될지는, 모국의 혹형주의적 성격을 감안하면, 대체적으로 감이 오기 마련이었다.


내 변호사는 내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무기징역까지 선고된 적이 있다며 겁을 줬다. 하지만 결국 선고된 건 예상 내의 범위였다. 나는 기결수가 되기 전에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미 미결수로 보낸 시간으로 형량을 다 채웠기 때문이다. 일단 잡아넣고 보자 주의가 모국에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최근에 모국에서 큰 화재가 났고 모국의 시스템 중 일부를 철저하게 경험한 바로는 확실히 모국은 그런 위험성이 있는 도시였다.


나는 이제 죽었으니 화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화재는 어떤 나라든지 일어날 수 있다. 오늘로 모국에서 경찰에 잡혀간지 딱 1년이 된다. 의미가 있는 숫자일까. 나는 수비학에 능하지 못하다. 1년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숫자일지도 모른다.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면 뭔가 달라질까. 그녀의 이름을 들었지만 기억까지는 하지 못하고 있다. 그녀가 누구인지 아는 데 이름이 중요할까. 그럴수도. 아닐수도.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나는 시체니까. 그 정도는 감안해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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