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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성근 May 15. 2020

재능 없는 아들에게

아빠 인문학

네가 처음 스케치북에 정확한 동그라미를 그렸을 때 네 엄마와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녀석은 틀림없이 위대한 화가가 되거나 수학자가 될 거야!” 아빠는 소리 쳤단다. 네가 비뚤지만 거의 정확한 삼각형을 그리고 사각형의 네 모서리를 네 개로 헤아렸을 때, 우리 부부는 확신했단다. “이 녀석은 수학 천재야! 저 어린 나이에 도형 감각을 가졌어!” 네가 오각형을 그렸을 때는 아예 말을 말자. 우리는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다. 세상에 오각형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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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딱 거기까지였어. 너의 공간 감각은 오각형에서 멈추더구나. 너는 더 이상 스케치북에 도형 그리는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지. 우리 부부는 잠깐 실망했지만 네가 그 다음에 보여 준 행동은 우리 부부로 하여금 다시금 희망을 갖게 할 만큼 충분했어. 그 때 네 나이가 만 4세로 접어들 무렵이었는데 갑자기 가르쳐 주지도 않은 한글을 혼자서 읽고 있는 게 아니겠니! 벽에 붙여 놓은 한글 그림을 보고 비행기, 배, 자동차, 기차… 이런 단어들을 읽어 낸 거야. 난 내 귀와 눈을 의심했단다. 저 비범한 언어 능력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애비는 다른 책을 가지고 시험해 보았어. 그런데 아쉽게도 거기서 탈락이더구나. 너는 한글을 읽은 게 아니라 벽지 그림과 함께 세트로 파는 CD 음악을 듣고 흥얼거린 거였어. 너는 한글을 아주 늦게야 터득했단다. 나는 오래 기다렸지만 너는 일곱 살이 되어도 한글을 몰랐고 여덟 살이 되어 학교에 들어간 후에 아슬아슬하게 한글을 익혔어. 그건 우리만 알고 있는 비밀로 하자. 


우리 부부는 정말 많은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네가 자라는 걸 지켜 보았단다. 어느 날 네가 가르쳐 주지도 않은 베토벤의 노래, “엘리제를 위하여”를 흥얼거렸을 때, 이번엔 음악인가 했지만 나중에 알았지. 장난감 상자를 열 때마다 그 음악이 나온다는 걸. 



그 다음은 그냥 죽 나열해 볼게. 백만 원도 넘는 수학 놀이 장난감 세트로 네가 했던 놀이는 그 장난감을 담고 있는 포장 상자를 쌓아 올리는 게 거의 전부였다. 어린이 과학 놀이 세트를 가지고 너는 전쟁 놀이를 했다. 큰 맘 먹고 사다 준 세계 명화와 함께 읽는 고전 동화 70권 전질은 10년 뒤에, 그래도 좋은 값을 받고 중고로 팔았다. 한번도 읽지 않은 책이 정확히 64권이더구나. 그 외에 학습지, 퍼즐, 두뇌 개발 장난감 등, 많은 시도와 자극이 끊임없이 너에게 더해졌지만 너는 TV와 비디오 게임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 비싼 과외를 시켜주고 학원을 보냈는데 중학교 때였나, 어느 날 네가 그러더라. “제발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둬! 아빠 하고 싶은 것만 하라고 하지 마! 아빠가 언제 내가 좋아하는 거 시켜준 적 있어?” 솔직히 난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단다. 지금까지 해 준 것들은 다 뭔가, 저 좋다는 걸 안 해 준 게 있었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저 좋다는 음식에, 온갖 특산물에, 철마다 가져다 바친 것은 다 무엇이며, 옷 하고 신발은 또 어떻고, 하다못해 제 방의 장판이며 벽지까지,  최고급으로 도배질 해 놓은 걸 보고도 저런 소리가 나올까. 


그래도 나는 참았다.  네가 하고 싶은 걸 시켜줬지. 기타 학원. 거기 두 달 다니고 ‘엘리제를 위하여’와 비슷한 곡이 네 방에서 울리는 걸 몇 번 들은 적 있다. 그때 샀던 기타가 지금 어디로 갔는지 잘 모르겠다. 꽤 비싼 기타였는데……. 지금 내가 나이 들고 보니 갑자기 기타가 치고 싶지 않겠니. 그 기타 다음에 찾으면 꼭 말해 다오. 


그래도 녀석, 여자 사귀는 재주는 있나 했어. 수첩에 적힌 이름들이 온통 여자애들 이름이야. 은근히 뻐기면서 네 엄마에게 말했지. “저놈이 그래도 날 닮아서 인기는 좋은가 봐. 수첩에 여자애들 이름하고 전화번호가 한둘이 아니야.” 하고 벙긋 웃으며 말했더니, 네 엄마 왈, “그거 다 학원 선생들 이름이에요. 테스트 통과 못해서 이 학원 찔끔, 저 학원 찔끔 다니다 보니 온통 여선생들 이름만 잔뜩 쌓인 거라고요.” 


내 기억으로는 그때부터 내가 좀 과묵해진 것 같다. 학교에서 너는 말 없고 착한 아이였고 집에 오면 너는 말 없는 고집불통이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말없이 그냥 서로를 지켜만 봤던 것 같다. 나는 집에서 매일 조간 신문을 두 번씩 읽었고 너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잠만 자더구나. 그래도 나는 네가 건강하게 커서 그거 하나만으로 행복하다. 어디 한 군데 다치거나 아픈 데 없이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했잖니. 


녀석, 어릴 때는 그렇게 잔병치레 하더니 커서는 감기 한번 안 걸리는 거 보면 참 신기하다. 네가 두 그릇씩 밥을 먹을 때마다 나는 흐뭇하다. 저 녀석이 날 닮아서 건강 하나는 타고 났다보다 싶어서. 허허, 허허허허허…….


지금까지 한 말은 전부, 네 할아버지가 이 아빠에게 한 말이란다. 그러니 괜찮다, 아들아. 재능 없는 이 아빠도 지금 너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잖니? 진정한 재능은 행복할 줄 아는 재주, 바로 그거다.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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