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by 송성근

AL-288-1. 잘 기억해 두자. 네 할머니의 이름이다. 나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이기도 하다. 별명은 루시.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되었다. 318만 년 전에 생존한 것으로 알려진 그녀의 학명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앞서 언급한 AL-288-1은 고고학 발굴 식별 번호다. 몸은 털로 덮여 있었고 키는 대략 140센티미터, 팔이 유난히 긴 그녀는 직립보행을 했다. 그녀의 별명이 왜 루시가 되었냐 하면, 이 엄청난 발굴에 흥분한 고고학자들이 밤에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틀었는데 비틀즈의 노리 <다이이몬드 가득한 하늘에 있는 루시>가 울려 퍼졌다는구나. 그 때부터 우리의 할머니 AL-288-1께서는 루시로 불리기 시작했다. 루시는 우리의 직계 할머니는 아니지만 그녀의 직계 후손이 세계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거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하면, 우리는 엄청난 확률로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말이다. 전북 무주에서 태어나신 네 진짜 할머니가 우여곡절 끝에 부산으로 가지 않았다면, 열여덟 살에 6·25를 겪었던 네 하아버지가 황해도 해주에서 1·4후퇴 때 남하하는 피난민 틈에 끼어 낙동강 전선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면, 아빠가 대학을 서울로 가지 않았다면, 또 엄마가 직장을 서울에 두지 않고 지방에 있었다면, 그 날 소개팅 자리에 둘 중 한 사람이라도 나가지 않았었다면, 너와 네 동생은 지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마어마하게 희박한 확률로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이 기막힌 우연을 설명할 길이 없어 사람들이 생각해 낸 것이 종교인가 보다. 종교에서는 ‘우연’의 문제를 필연으로 승화시킨다.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그것 말고는 다른 경우가 있을 수 없는 신의 뜻. 너와 나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는 가수 노사연의 옛 노랫말에도 이 장엄한 신학적 통찰이 들어가 있다. 나는 너희를 만난 것이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면 네가 그저 종속과목강문계에 속하는 사람 종으로서 단지 한 쌍 사람 종의 번식의 결과일 뿐이라면 설명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저 하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대충 설명할 수 있는데(태양계, 은하계 등등), 너와 나의 만남은 결코 쉽게 설명할 수가 없다.


이름은 세 가지 층위가 있다. 한글 기표로서의 이름, 다른 사람과 구별해 주는 이름, 그리고 너 자신이다. 그것은 마치 나이키 운동화를 샀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나이키는 ‘나이키’ 운동화이고, 직물과 고무로 된 운동화이며, 네가 신은 너의 나이키 신발이다. 식당에 가서 똑같은 신발이 있다고 해서 네 것이 아니다. 나이키라고 불리지만 다 같은 나이키가 아니고 네가 신은 신발만이 참된 너의 나이키 신발이다. 너의 이름도 그와 같다. 너는 단지 너의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너의 이름 자체가 아니라 누가 너의 이름을 어떤 방식으로 부르는가다. 학교에서 출석을 불렀을 때 너의 이름은 식별의 의미이지, 너의 존재를 부른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멀리 있는 친구가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도 네 이름을 소리로 부른 것이지 너의 존재를 부른 것이 아니다. 네 이름이 참된 존재로 불릴 때는 ‘진실의 위치’에서 그 이름을 부를 때이다.


네가 아파하고 있을 때 나는 네 존재를 불렀었다. 성적과 친구 관계, 미래에 대한 불안에 휩싸여 있을 때도 나는 네 존재를 불렀다. 네가 처음 태어나 울음을 터뜨렸을 때 갓 지어 놓은 이름, 그 이름을 부름으로써 너는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 이름이 있다는 것만으로 하나의 존재가 되는 일은 없다. 온몸과 온힘을 다해 불러 주어야 그 이름은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너의 이름은 너 혼자만의 호칭이 아니라 타인의 호명 속에서, 타인의 갈구하는 외침에 의해 존재가 된다.


길거리를 지나다가 큰 소리로 아이 이름을 부르는 여자를 본 적이 있다. 엄마를 졸졸 따라가던 아이가 건널목 한 복판에서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흘러 내리는 액체를 핥아 먹느라 길 한 가운데 섰다. 달려 오던 자동차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앞서 가던 아이 엄마는 뒤를 돌아 온몸과 힘을 다해 아이 이름을 불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사방 일백미터 이내의 사람들이 모두 가던 길을 멈추어 섰다. 자동차도 섰다. 아이는 놀란 나머지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울면서 엄마를 향해 달려 갔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던 순간에 터져 나온 이름, 그것이야 말로 이름이 갖는 초월적인 힘을 보여 준다.


소위 떼창이라 하는 이름의 호명도 있다. 수많은 관중들이 연예인의 이름을 떼창으로 연호하면 그는 감격에 겨워 무너지듯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면 또 관중들은 괜찮아, 괜찮아, 하고 연발한다. 이 때 부르는 이름은 힘을 주는 부름이다. 살면서 그런 부름을 받을 때가 몇 번이나 있겠느냐마는 그런 상황이 되면 울지 않을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이렇게 이름의 부름은 힘이 있다.


이름은 경악과 공포 속에서 인간이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보호 수단이기도 하다. 갑자기 전기가 나간 실내를 생각해 보자. 화재 경보가 울리고 사람들이 비상구로 몰리면 서로 떨어진 사람들은 겁에 질려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서로의 이름이 혼돈 속에 뒤엉켜 이름이 뭉개어진다. 그래도 사람들은 악착같이 이름을 부른다. 이름 밖에 구원의 수단이 없다. 이 때 이름은 생명의 부름이 된다.


나는 집에 혼자 있을 때 가끔 너의 이름을 부른다. 대답이 없는 부름이 천장과 벽을 때린다. 반향된 이름이 내 귀에 들어온다. 너의 존재는 멀리 있고 (지금 너는 미국에 가 있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너의 이름은 공허한 메아리가 된다. 때로는 너의 환영이 오락가락 하는 재미난 신비 체험도 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대답 없는 이름을 불러 댈까?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30% 이상이 나홀로 가구이며 그들 대부분이 고령자라 한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없다. 이름은 그것을 부를 때 비로소 이름이 되는데,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면 이름은 푸석한 박제 같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온힘을 다해 부르던 이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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