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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틀랜드의 작은 연인들 ep08

우리는 잘 살고 있어요

by 루미상지
워싱턴 레이니어 산


작은딸에게 간다.

시애틀 타코마 공항에 도착했다. 13도의 쌀쌀한 날씨로 보슬비가 내린다. 시애틀 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 바로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이 나오는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tle)’이다. 왠지 멋진 사랑이 시작되고 이루어질 것 같은 도시다. 우리는 공항에서 자동차를 렌트했다. 열네 시간의 비행으로 피곤하다. 공항 호텔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딸과 사위는 포틀랜드에서 올라오고, 우리는 시애틀에서 내려가며 레이니어 국립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시애틀과 오리건주에는 세 개의 국립공원이 있고 레이니어산 (4,392m) 국립공원이 중간지점에 있다. 딸과 사위는 레이니어 국립공원에 에어비앤비를 예약해 놓았단다.


국립공원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주차를 하고 나니 저 멀리 머리를 묶은 여자애 둘이 손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남편과 나는 우리 애들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때 그 애들이 반갑게 웃으며 달려온다. 맙소사. 사위의 머리가 길어 묶고 있었나 보다.

내 품에 쏙 들어오는 딸을 안으니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하다. 딸이 사랑하는 남자, 멋진 사위도 안아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서로를 뜨겁게 포옹했다.

“5월인데 아직도 눈이 쌓여 있네.”

“그러니까 어머님 아버님 옷 따뜻하게 입고 오시라고 했지요.”

우리를 위해 준비한 여벌의 재킷과 아이젠을 트렁크에서 꺼내주었다.

넓은 주차장의 여러 곳에서는 아이젠을 끼우고, 스틱을 조립하고, 모자를 쓰며 등반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국말이 들려 돌아보니 60대 중반의 아저씨들이 차에서 내리더니 사진만 찍고 바로 떠났다.

파라다이스 방문자센터를 출발하는 코스는 다양하고 많았다. 그중 가장 짧은 한 시간 코스를 걷기로 했다.


파란 하늘과 쾌청한 날씨, 아이젠을 착용하고 눈 쌓인 레이니어산을 올랐다. 눈 속에는 크리스마스트리인 전나무들이 군데군데 서 있었다. 길은 초입부터 오르막이 가팔랐다. 푹푹 빠지는 눈 속을 걷는 것은 힘들었다. 헉헉거리며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나를 보고 사위가 말했다.

“어머니 힘들면 말씀하세요. 고산증이 올 수도 있어요.”

“조금 힘들지만 괜찮아. 참을만해.”

한참 오르다 보니 땀이 났다. 재킷을 벗어 허리에 묶었다. 목표지점에 오르니 저 멀리 만년설로 덮인 봉우리가 더 가까이 보였다. 맑고 깨끗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애들은 더 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만 내려가기로 했다. 미끄러운 눈길을 내려오는 건 올라가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딸과 사위는 눈밭에서 깔깔거리며 신났다.

“엄마, 앞으로 걷기 힘들면 옆으로 이렇게 걸어봐. 아니면 뒤로 걸어봐 이렇게.”

푹푹 빠지는 눈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잘도 내려간다.



예약해 놓은 숲 속 집에 도착했다. 저녁에 먹을 고기, 채소, 과일과 아침에 먹을 빵, 주스를 정리하며 사위가 말했다.

“여기에선 저희가 호스트이고 어머님, 아버님은 게스트입니다. 우리들이 다 준비할게요.”

매주 토요일 날 둘은 함께 일주일의 식단을 짜고 장을 본단다. 알콩달콩 둘이 부엌에서 식사 준비하는 모습을 보니 흐뭇하고 든든했다.

5년 전, 작은딸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공부를 조금 더 하고 싶다며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박사과정 중 딸보다 먼저 와 공부하고 있던 오빠를 만나 사귄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말했다.

“엄마, 오빠가 결혼하재.”

“응? 벌써? 오빠가 좋으면 친구로 잘 사귀다가 학위를 마치고 결혼하는 건 어떨까?”

딸은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바깥사돈이 어차피 할 거면 빨리 하자고 하셨다.

“저도 스물아홉에 스물넷 집사람과 결혼했습니다. 스물네 살은 어린 나이가 아니지요.”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너무 빨라요. 게다가 저희 애는 12월생이에요.”

그러나 바깥사돈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둘러 날을 잡자고 했다. 작은딸은 언니보다 먼저 결혼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살림하며 공부하는 게 안쓰러웠다. 힘들지 않을까? 걱정도 많았다.

딸은 학위를 마치자마자 바로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직장을 잡았다. 사위는 아직 학위가 끝나지 않았다. 사위의 지도교수는 온라인으로 공부해도 된다며 애들이 이사하는 걸 허락하셨단다. 동부 필라델피아에서 서부 포틀랜드로 긴 거리를 이사해야 했다. 다행히 회사에서 집을 구하는 것부터 자동차와 이삿짐 옮기는 것까지 모두 지원해 주었단다.


저녁 먹기 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기 위해 수영복을 입고 자쿠지(물에서 기포, 거품이 나오게 만든 욕조의 브랜드 이름)로 들어갔다. 나는 뜨거운 물속에서 반신욕 하는 걸 좋아한다. 그런데 방콕에 사는 9개월 동안 한 번도 욕조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방콕 집에는 욕조가 없다. 그런 나를 고려해 딸은 일부러 자쿠지가 있는 에어비엔비를 선택했다고 한다. 얼굴은 서늘하고 몸은 따뜻하고 물의 압력은 기분 좋았다. 우리가 뜨거운 물속에서 즐기는 동안 딸과 사위는 장작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채소를 씻었다.




저녁을 먹은 뒤, 사위가 내일 점심 내기 젠가 게임을 하자고 했다. 게임은 아주 흥미진진했다. 젠가 나무토막을 빼다가 진 게 아니고 모두 실수로 졌다. 오래된 테이블은 수평이 맞지 않았다. 남편이 할 차례가 되었을 때 약간의 진동에 테이블이 흔들거리더니 젠가가 쓰러졌다. 사위는 신중하게 생각하다가 팔꿈치로 젠가를 스치는 바람에 쓰러졌다. 내가 이겼다. 나는 의기양양 큰소리를 쳤다.

“엄마가 운동신경이 아주 발달했다고 했지? 우리 학교 육상, 탁구 대표 선수였다고.”

사실이다.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초등학교 때 학교 대표 선수로 뛰었다. 그렇다고 젠가게임에 운동신경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었다. 기분이 좋아 허풍을 떨었다.

다음 날 딸네 집으로 갔다. 조용한 동네에 들어서자, 집집마다 화려한 색깔의 장미가 한창이었다. 은은한 장미 향이 달콤했다. 포틀랜드는 장미의 도시란다. 집안은 아직 이삿짐 정리가 되지 않아 어수선했다.

남편과 사위는 서둘러 홈디포(주택 리모델링용 건축자재와 가구, 원예용품 등을 파는 매장)에 가서 하얀색 페인트, 롤러, 붓, 사다리를 사 왔다. 바닥에는 커다란 비닐과 종이를 깔았다.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허드레옷을 입고 랩으로 신발을 돌돌 말아 신고 페인트칠을 하기 시작했다. 주말 내내 페인트칠을 했다. 다들 어깨와 고개가 아프다고 했다. 페인트칠을 끝내고 나니 집은 깨끗한 새집으로 변신했고 모두 만족했다.

“누가 칠했는지 정말 잘했네. 이건 페인트칠이 아니고 예술 작품이다.”

아이들은 우리에게 고마워했고, 우리는 모든 걸 스스로 하려는 아이들을 도울 수 있어서 뿌듯했다.

월요일, 출근하는 딸의 뒤를 따라 모두 차고로 갔다.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드는데 어라? 사위도 같이 차에 탄다. 조수석에 앉더니 그새 무슨 할 말이 또 생긴 걸까? 둘은 차 안에 앉아 한참을 웃으며 얘기했다. 드디어 딸은 출발했고 차에서 내린 사위도 공부하러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워싱턴 파크’를 산책하러 갔다. 워싱턴 파크는 포틀랜드에 있는 공원으로 로즈가든과 일본 정원이 유명하다. 지금은 장미의 계절 5월이고 로즈가든에는 아름다운 장미꽃이 만발했다.

작은 스낵바 앞에서 할머니가 끙끙거리며 커다란 개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우리를 보더니 하소연했다.

“우리는 날마다 이곳에서 소시지를 사 먹었어요. 하지만 오늘은 스낵바가 문을 닫았어요. 그런데 재키가 집에 안 가겠다고 버티네요. 문 열 때까지 기다리려나 봐요.”

참 난감한 상황이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재키에게 말해주었다.

“재키야, 미안해. 오늘은 할머니 말씀 듣고 내일 두 개 먹는 건 어때?”

재키를 달래고 집으로 돌아왔다. 재키는 말을 들었을까?

열흘간의 딸네 집 방문을 마치고 헤어지던 날, 딸과 사위가 안아주며 말했다.

“어머님, 글 쓰신다고 너무 오랫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계시면 안 돼요. 허리 아프고 눈 나빠져요.”

“엄마 아빠는 꼭 운동을 해야 돼요. 아빠는 사탕 조금만 드시고요.”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애들이 오히려 우리를 걱정한다.

“알았어. 조절해서 신경 쓸게. 우리 모두 건강에 신경쓰자.”


딸과 사위는 포틀랜드에서 잘살고 있었다. 빨리 결혼시키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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