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 보고 싶어요
다 자란 아이들은 모두 집을 떠났다. 텅 빈 방들만 남아 집을 지킨다.
볕 좋은 봄날, 방안까지 환하게 비춰 들어온 밝은 햇살을 따라 책을 읽는다.
안소영 작가의 ‘책만 보는 바보’다. 조선시대 정조 임금님과 실학파 학자들의 이야기이다. 외로운 서자 출신 이덕무와 그의 벗들이 반쪽 양반 신세를 한탄하고 있다. 벼슬길에도 못 나가고, 농사도 못 짓고, 장사도 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책만 보는 바보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덕무처럼 나도 방향을 바꿔가며 책을 읽는다.
잠시 책을 내려놓고, 찻물을 끓인다. ‘뽀글뽀그르르~~~’
텅 빈 방에 물 끓는 소리가 요란하다. 주인 없는 빈방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던 책상과 침대에 살짝 생기가 돈다.
남편과 나는 1990년 1월 결혼했다. 우리는 신혼집으로 방 두 칸짜리 조그만 아파트를 세 얻었다. 행복한 신혼생활을 즐기기엔 충분한 집이었다.
다음 해 큰딸이 태어났다. 방 두 칸짜리 작은 아파트에 당첨되었다. 작지만 우리 아파트를 갖게 되었다. 우리가 살던 곳은 지방이어서 서울처럼 경쟁률이 치열하진 않았다. 셋이 살기엔 부족함 없이 편안하고 행복한 보금자리였다.
몇 년 뒤, 둘째 딸이 태어났다. 그리고 방 세 칸짜리 아파트로 옮겼다. 남편은 드디어 자기 서재가 생겼다고 좋아했다.
딸들은 한 방에서 이층 침대를 썼다.
몇 년 뒤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소형 승용차가 중형차로 바뀌었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조금 더 작은 도시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어린애들이 셋인 우리는 방 네 칸짜리 아파트 1층으로 옮겼다. 그곳은 입주를 시작한 지 좀 지났지만, 미분양으로 오랫동안 남아있던 아파트였다.
우리는 1층을 원했고, 그 지역 주민들은 1층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래서 분양가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입주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자기 방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딸들 방은 딸들이 원하는 노랑과 핑크색으로 공주님 방처럼 꾸며 주었다. 아들 방은 아들이 좋아하는 파란색으로 꾸몄다.
중학교에 진학하게 된 큰딸은 조용히 혼자 공부하고 싶다며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둘째 딸 역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가끔 한밤중에 자다 깨어 우리 방으로 건너오기도 하지만 당연히 막내아들도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그들만의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잠갔다. 식사할 때와, TV 볼 때, 가끔 손님들이 올 때를 제외하고는 각자의 방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춘기가 시작된 아이들은 방문 앞에 '노크하시오'라는 팻말까지 붙여 놓고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어쩌다 노크 없이 불쑥 들어가기라도 할라치면 볼멘소리를 했다.
"엄마, 아빠는 매너가 없으시네요."
꼭 닫혀있던 큰딸 방문은 멀리 기숙 고등학교로 떠나면서 제일 먼저 열렸다. 큰딸 방엔 커다란 피아노만 덩그러니 놓여있게 되었다. 둘째 딸도 기숙 고등학교를 가면서 방문이 열렸다. 둘째 딸 방엔 책상과 침대만 놓여있다. 마지막으로 아들은 기숙 중학교에 가면서 누나들보다 방문이 조금 더 빨리 열렸다.
꼭꼭 닫혀있던 방문들이 이렇게 빨리 열릴 줄은 몰랐다. 답답하게 닫혀있던 방문이 활짝 열린 것은 좋았다. 하지만 그 방에 있어야 할 주인들이 모두 떠나버려 더 외롭고 쓸쓸하기만 하다.
그 옛날 이덕무와 그의 벗들은 가난한 방 안에서 임금님이 불러 주기만을 기다렸다. 각자 신분의 굴레에 갇혀 바보처럼 외롭게 책만 읽으면서.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다.
이 순간 우리 아이들은 어딘가 자기만의 방 안에서 또 다른 커다란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룰루랄라’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 아빠 보고 싶어요. 이번 주말에 집에 내려갈래요."
방을 떠났던 반가운 딸의 목소리가 안부를 묻는다.
200년 전 이덕무의 책을 비추던 따사로운 햇살이 오늘 아침 내 책 위를 비추고 있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 우리 아이들이 꿈꾸고 있는 방안도 환하게 비춰주고 있을 것이다.
남편을 만나 우리들만의 보금자리를 꾸린 지도 어느덧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둘이 만나 셋이 되고, 넷이 되었다가, 다섯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우리 둘만 남았다. 남편과 나는 텅 빈 방들을 청소하며 방의 주인공들이 돌아올 주말을 기다리고 있다.
환한 햇살이 내 책 위를 지나 이 방 저 방 기웃거리며 굴러다닌다. 그러다 주인 없는 쓸쓸한 방들에서 심심했는지 슬그머니 따뜻한 내 찻잔 속으로 비춰 들어온다.
* 이 글은 오래전에 아이들을 키울 때 써놓은 글입니다. 지금은 다 독립해서 집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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