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담론과 모성원형
모성담론이 문제 되는 것은 왜일까요? 어머니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자녀가 있어야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자녀를 낳거나 입양하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지만, 자녀가 없이는 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보면 어머니는 완벽하게 자녀를 전제로 한 개념입니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어머니들은 자녀를 위해 삽니다. 자녀가 자기 인생의 일 순위가 됩니다. 이것은 강요가 아닌 선택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선택은 독자적일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규정한 어머니상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모성담론이 어머니의 선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죠. 물론 모든 인간은 그를 둘러싼 사회의 의식과 분위기, 그리고 유무형의 질서에 영향을 받습니다. 문제는 어머니의 선택이 완전히 독자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선택에 영향을 주는 모성담론의 내용이 문제인 것입니다.
모성담론이 문제 되는 첫 번째는 어머니를 그 자신이 아닌 자녀를 위한 존재로 규정하는 데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서만 살 거야.'라는 다짐과 '너는 누군가를 위해서만 살아야 해.'라는 규범은 천지차이입니다. 모성담론은 사회가 집단적으로 만들어낸 무형적 규범으로 개인에게 다짐을 강요합니다.
게다가 모성담론에서의 '모성'은 어머니의 사랑과 같이 추상적이고 아름답기만 한 개념이 아닙니다. 김택호의 분석에 따르면 여기서의 '모성'은 단 하나의 성질이나 개념이 아닙니다(김택호, 2016). 세 가지가 섞여 있습니다. 첫째는 육아, 교육, 가사노동에 대한 성실성이며, 둘째는 자녀에게 포용적이되 엄격한 성격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헌신과 희생이라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와 같은 '모성'은 바람직한지 여부를 떠나 우리에게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과연 이게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인가?', '모성이란 것이 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는 자질인가?' 그러하기에 모성담론에서 어머니는 구원의 여인상으로 인식됩니다. 찬미의 대상인 것이죠. 하지만 그 반대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괴물의 이미지죠. 헌신의 이면에는 집착이 존재할 테니까요(이동옥, 2010).
모성담론에서는 어머니에 관한 이러한 이미지가 당위를 넘어 본성으로까지 인식됩니다. 이에는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인 칼 융(Carl Gustav Jung)의 영향이 커 보입니다. 융은 그의 전체 생애에 걸쳐 원형(Archetype)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원형이란 인간의 집단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공통된 상징 또는 이미지입니다. 집단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보편적으로 지니게 됩니다.
칼 융이 제시하는 모성 원형은 기본적으로 생명을 주고, 돌보며 보호하는 존재입니다. 자비로운 존재로 표현됩니다. 이 차원에서 모성은 한없이 긍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면 독이 됩니다. 보호가 지나치면 소유욕으로 발전하고 자녀의 성장은 지체됩니다. 이러한 면에서 어머니는 자녀를 억압하고 파괴하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칼 융이 말하는 모성 원형의 부정적 측면입니다.
하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머니가 그녀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자녀를 위한 존재로만 역할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녀의 인생이건만 그녀는 사라집니다. 이러한 현상은 아기가 태어난 후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출산 전부터,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이 그어졌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 먹을 뿐 아니라 즐기던 기호식품을 끊기도 합니다. 하루 한 잔 정도의 커피는 괜찮다는 이야기를 의사로부터 전해 듣는다고 해도 안심은 되지 않습니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카페인을 아예 입에도 대지 않는 예비 어머니들이 다수입니다. 모성 담론이 임산부 몸에 대한 통제로까지 확대된 것이죠(이하 서술하는 모성담론이 장애자녀의 어머니에 미치는 영향은 이동옥, 2010을 참고하였다). 혹여라도 아기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면 어머니는 죄책감과 부채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비합리적 사고임을 알면서도 임신 중 자신이 무언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닐까, 잘못한 것이 있었을까 되돌아보고 자책하게 됩니다. 이러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는다고 해도 장애 자녀의 돌봄은 거의 어머니의 몫이 됩니다. 아직 미흡한 장애인 돌봄 제도의 현실에서 그 역할은 가족에게 돌아가고, 모성담론에서 어머니는 희생과 돌봄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장애 자녀에 대한 헌신이 세상의 찬사를 받기도 합니다. 장애를 극복하고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장애인 성공신화가 미디어를 통해 창출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인기를 누리던 여성 가수가 일을 접고 장애 자녀의 뒷바라지에 전념하여, 자녀를 미국 대학교수로 성장시킨 경험 등입니다(레이디경향, 2009). 어머니로서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겁니다. 매우 뿌듯할 뿐 아니라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녀의 희생은 매우 존경받을만합니다. 당연합니다. 자녀가 장애를 극복한 것, 이것은 어머니가 일생을 헌신한 것에 대한 보상 같기도 합니다. 이것이 모성담론에서의 이해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헌신이 매우 존귀하고 찬사 받을 일임과는 별개로 점검할 것이 있습니다. 모성담론이 장애 자녀를 둔 어머니의 다른 선택지들을 삭제해 버린 것은 아닌지, 굳이 다른 길을 택했을 때 그녀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 참고 문헌
김택호. (2016). '엄마'라는 문화적 기억의 재현과 수용: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의 경우: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의 경우. 돈암어문학, 30, 73-97.
레이디경향(2009.1.). 뇌성마비 장애인 최초 미(美)조지메이슨 대학 교수가 된 정유선.
이동옥. (2010). 한국의 장애인 돌봄제도와 모성담론에 관한 연구. 미디어, 젠더 & 문화, (14), 111-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