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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승광 Apr 12. 2019

노동이냐, 근로냐

같은 것도 같고, 다른 것도 같은 두 개의 단어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와 읽는 당신 모두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자산도, 부모님께 앞으로 물려받을만한 유산도 없을테니까요. 혹은 운 좋게도 유산을 물려받는다 해도 그것을 굴려 나의 인생을 영위하는 것은 불가능할테니까요.  


‘노동’과 비슷한 말로 ‘근로’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얼핏 봐서는 같은 말인 것 같습니다. 근로기준법에서도 ‘근로’를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니, 우리 법률상 이 둘은 동의어로 봐도 좋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치부하기엔 어딘가 찜찜합니다. 2018년 정부가 제출한 헌법개정안의 내용 중 하나는 ‘근로’를 ‘노동’으로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개정안이 나오자 찬반 논란이 일었습니다. 노동계나 노동법학계 다수에서는 환영하는 분위기였지만 일각에서는 좌파적 발상이라는 비판도 일었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동일하게 쓰이는 실제와 달리, 이 둘 사이에는 커다란 철학적 간극이 존재한다는 거죠. 일하는 시간을 누가 지배하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Photo by Waldemar Brandt on Unsplash

국어사전적 풀이부터 시작해 보기로 하지요.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근로’는 “부지런히 일함”으로, ‘노동’은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 또는 “몸을 움직여 일을 함”으로 해석됩니다. 어떠신가요? 차이를 찾으셨나요?


저는 ‘근로’의 풀이에서 “부지런히”라는 단어에 주목합니다. 부지런하다는 평가 말입니다. 한 번 거꾸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지런히 일하지 않는다면 근로가 아닌 걸까?’라는 의문을 던져보는 겁니다. 답을 하실 수 있으신가요? 멈칫하게 되지 않나요? 왜일까요?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질문이 우문(愚問)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근로’라는 단어의 풀이에 따르면 근로가 아닌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부지런하지 않다면 일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아무리 느긋한 사람이라도, 일을 하는 그 순간은 부지런해집니다. 부지런하지 않다면 일은 그 진도가 나가지 않을테니까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겁니다.


물론 우문(愚問)을 피해서 질문을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부지런히’의 뜻이 “어떤 일을 꾸물거리거나 미루지 않고 꾸준하게 열심히 하는 태도로”이니, 태도에 중점을 맞추어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부지런한 태도는 누가 평가하는 걸까요? 나 자신이 아닌 타인입니다. 어느 정도가 부지런한지 그 기준도 타인의 머릿속에만 존재하게 됩니다. 내가 하는 일이 근로냐에 관한 결정을 타인이 한다는 의미입니다.

Photo by Jakob Owens on Unsplash

무언가를 규정한다는 것은 그것을 지배한다는 의미와 동일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배하지 못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이름 하나 붙이지 못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려는 것이 ‘근로’라면, 우리는 이것을 위해 타인의 결정을 기다려야 합니다. 정해진 시간동안 일한 후, 우리가 부지런히 일했음을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하는 거죠. 우리가 일한 시간들은? 타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려는 것이 ‘노동’이라면 어떨까요? 타인의 인정 따위가 필요 없게 됩니다. 나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수령한다는 약속을 하고, 이 약속에 따라 노동력을 제공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노동계약에는 타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시간까지 포함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노동력을 그 시간동안 제공한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정해진 노동시간이라 하더라도 그 시간은 여전히 나의 삶을 위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의 성격은 타인의 결정에 따라 변하지 않으며, 변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당신께 묻고 싶습니다.

노동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근로를 하시겠습니까?

온전히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커버 이미지 : Photo by Umanoid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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