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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승광 Apr 18. 2019

은폐된 노동시간

퇴근은 왜 노동을 끝내지 못하나?(1)

우리의 노동시간은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 외에도 존재합니다. 법정노동시간에서 빠지는, 공식적이지는 않아도 실질적인, 이른바 ‘은폐된 노동시간’입니다. 한 직장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점심식사요? 바이어와의 식사가 많아요. 그렇지 않으면 부서에서 부서장과 함께 먹기도 하죠. 어느 쪽이나 편하지 않죠. 바이어든 부서장이든 제겐 갑이니까요.”  


바로 법률상 ‘휴게시간’으로 불리는 점심시간입니다. 법에 따르면 이 휴게시간은 노동자의 자유로운 처분에 맡겨져야만 합니다. 하지만 인터뷰이의 점심시간이 그의 자유로운 영역에 속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바이어든 부서장이든” 갑과 함께 식사하는 것. 그것은 그에게 노동이 됩니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스마트폰의 발달로 인해 여가시간이 노동시간으로 탈바꿈된다는 것이죠. 혹자는 이에 대해 잠시 메일을 확인하고 답을 하는 것이 뭐 그리 과중한 노동이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노동법의 확고한 해석에 따르면 노동시간은 노동대기시간을 포함합니다. 이는 노동관계를 판단하는 표식, ‘종속성’의 당연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종속성이 갖추어진 상태란 나의 활동이 사용자의 지배하에 놓여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Photo by Thom Holmes on Unsplash

스마트기기를 통해 노동자의 자본에 대한 종속성은 강화되며,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의 경계는 허물어집니다. 노동자가 누리는 삶의 시간이 스마트기기로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노동을 하루 24시간 전체에 걸쳐 착취하려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적 충동”이라는 칼 맑스의 통찰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공공기관에 다니고 있는 친구 B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퇴근 후에 집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다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부재중전화가 와 있더랍니다. 정부부처의 담당 사무관인데, 확인 즉시 전화하라는 카톡 메시지도 함께 와 있었습니다. B가 전화를 하니, 사무관은 왜 전화를 안 받느냐는 꾸중부터 시작하더랍니다. 아이를 돌보느라 전화 온 줄을 몰랐다며 죄송하다고 했지만, 사무관이 하는 말은 다음이었습니다.


“B차장 교육을 다시 받아야겠네.”


친구와 함께 삽겹살을 굽고 있던 저는 손에 들고 있던 소주잔을 떨어뜨릴 뻔 했습니다.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었나싶기도 했고, 평소 들어보지 않았던 대사에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당황한 제 얼굴을 보던 B는, 오히려 저를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말하며 소주잔을 부딪혀줍니다.


“뭘 이런 거 가지고 그래? 그냥 그런가보다 하면 되지 뭐.”


그 사무관이 B에게 전화해서 시킨 것은 연구보고서 요약이었다고 합니다. 내일 아침 상관께 보고드리고 싶으니 연구보고서를 한 페이지로 요약해서 본인의 출근시간 전까지 메일로 보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B는 아이가 잠들자마자 노트북을 열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사무관이 그 시간에 카톡으로 보낸 연구보고서는 무려 200쪽 분량이었습니다.

Photo by Christa Dodoo on Unsplash


*커버 이미지 : Photo by Sameer Bhaleka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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