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되는 마음으로
입하 : 양력 5월 5일경. 여름의 시작.
5월 초, 알록달록한 봄에서 연한 초록빛이 번지기 시작한 여름의 길목. 나는 혼자 하동으로 향했다. 올해의 목표를 ‘국내여행 많이 하기’로 정해, 지난 12월부터 제주와 통영, 거제, 공주를 차례로 다녀왔다. 서울을 떠나기 전, 나는 여느 때처럼 불안하고 쭈굴쭈굴한 상태였다. 혼자 가는 국내 여행은 이제 제법 익숙했지만, 어쩐지 이번 여행은 반드시 유의미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정확히 무엇인지 모를 광범위한 고민의 한복판에서 이 여행이 해결의 실마리가 되길 바랐던 것 같다. 그러나 뭉툭한 고민에 뾰족한 해결책이 금세 나타날 리가 없다. 고민은 해결의 기미 없이 더 넓고 깊어져만 갔다. 나중에는 그냥 서울만 아니면 어디든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있던 곳에서 멀리 떠나고 싶었다. 챙겨간 짐보다 무거운 마음이었지만 어쨌든 여행은 시작되었다.
9박 10일이라는 나름 긴 여행의 시작부터 장대비가 쏟아졌다. 차도 없는 뚜벅이라 걸어 다녀야 했는데, 걷는 것은 좋아했지만 내 우산이 문제였다. 혹시 몰라 챙긴 작은 양산 겸 우산은 장대비에선 별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계획에 차질이 생겨 가려던 찻집에도 못 가고, 불일폭포의 절경도 보지 못했다. 쌍계사에서 연등과 수국을 닮은 꽃, 몇 안 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터덜터덜 내려왔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내내 스스로를 탓했다.
‘왜 이렇게 작은 우산을 챙긴 거야?’
‘더 꼼꼼히 알아봤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종종 스스로가 가장 날카로운 악플러가 된다.
평일이라 길은 유난히 고요했다. 장대비로 흐릿하고 어두워진 풍경 속을 걸어 내려왔다. 그러다 주황색 불빛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찻집이었다. 평소의 나라면 바로 검색을 해서 정보와 리뷰를 찾아봤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지친 걸음을 멈추고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는 곳이라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바로 들어가 차를 한 잔 주문하고 자리를 잡았다. 찻집의 손님은 나뿐이었다.
“혼자 여행하시는 거예요?”
사장님의 질문으로 차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질문이다. 아직 차를 마시기 전인데도 순간 마음이 말랑해졌다. 어쩌면 나는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자리에서 두 시간 남짓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가업으로 오랫동안 차를 하셨는데 권태로웠던 적은 없으셨는지, 저 기물은 얼마나 되었는지. 이야기를 수집하는 사람처럼 질문했다. 평소에는 사람에게 궁금한 점이 별로 없는데, 여행만 가면 굉장한 인터뷰어가 된다. 찻잔이 비워지면 어느새 또 채워졌다. 어떤 이야기가 맺으면 금세 다른 이야기가 피어났다. 바깥의 빗소리와 은은한 향냄새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자세한 대화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 마디씩 주고받는 동안 서로에게 즐거운 시간이 쌓여갔다. 바깥을 살피던 사장님은 비가 아직 굵다며 직접 만드셨다는 다식을 한 접시 더 내어주셨다.
비가 잦아들 즈음 찻집에서 나왔다. 울적하던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나는 무엇이 필요했던 걸까? 휴식일까. 사람일까. 대화일까. 생각 속을 더듬다 보니 이번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때가 떠올랐다.
짧은 워홀을 마치고 귀국한 후 처음 갔던 미용실에서였다. 언어가 많이 부족한 상태로 타국 생활을 한 터라 표현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곳에서 미용사 선생님과 길지 않은 몇 마디를 나눈 것이 대화의 전부였다. 그러나 나는 신이 났다. 하고 싶은 말을 섬세하게 다듬어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대단히 기뻤다. 같은 말도 더 다정히 전할 수 있었다. 다정하게 대한다는 것은 사실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로부터 시작된 다정함이 나를 북돋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조금씩 여행에 대한 설렘이 커졌다. 어떤 용기와 기대감이 생겼다. 나는 여행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에너지를 대화와 친절함에서 찾았다. 일부러 홀로 떠나온 여행이지만 그 사이사이 사람들과 나눈 교감이 혼자의 시간을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 에너지는 더 우연하고 영화 같은 여행을 하도록 나를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