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하(하)

답장이 도착했습니다.

by 스구

입하 : 양력 5월 5일경. 여름의 시작.








지금까지 혼자 갔던 여행지에서 나는 잠깐 스치는 여행객, 손님 정도였다.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일시적이고 얕은 감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서로의 손바닥이 맞닿아 경쾌하게 “짝!”하고 소리가 나는 듯했다. 나의 말이 즐겁게 가고 상대의 말이 반갑게 오는. 일방적이거나 일시적인 즐거움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동에서 머문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계획했던 여행 일정을 마치고 숙소를 향해 돌아가던 길에서 정겨운 옛 노랫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무슨 노래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음악소리를 따라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옮겨졌다. 호기심에 살며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천연 염색을 한 색색깔의 옷과 스카프, 멋진 다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가게 안쪽에서 사장님은 지인으로 보이는 분들과 대화 중이셨다. 구경을 하다가 연둣빛의 스카프가 눈에 들어왔다. 대충 챙겨 온 심심한 여행룩에 산뜻한 포인트가 될 것 같았다.



결제를 마치고 주섬주섬 챙겨 나가려는데 사장님께서 차를 한 잔 권해주셨다. 며칠 동안 하동에 머물며 체감하게 되었는데 제주에서는 귤이, 하동에서는 차가 생활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찻자리는 어디를 가도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흔쾌히 응하고 자리에 앉았다. 옆에는 사장님의 지인 두 분도 함께였다. 두 분은 모녀 사이이고 딸은 고등학생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그들의 시간에 내가 끼어있다는 느낌이 들어 굉장히 뻘쭘하게 앉아 차만 홀짝였다. 잠시 뒤 다른 한 분이 찻자리에 합류했다. 그들은 대학 시절 같은 동아리의 부원들이었고 종종 모임을 갖는다고 하셨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차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조심스레 오가던 질문 사이에서 ‘여행’과 ‘창작 활동’이라는 공통 주제를 발견했다. 공통의 주제는 낯섦이 있던 자리에 호기심을 데리고 왔다. 우리는 한층 편안해진 마음으로 각자의 경험을 나누었다. 연령대가 다양했으나 좋은 대화에서 나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 자리에서 쌍계사에서 봤던 수국처럼 생긴 꽃이 ‘불두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간단히 차 한 잔만 마시고 가려고 했던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나는 빵과 김밥까지 얻어먹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약간 허기가 졌다. 그만큼 자리가 즐거웠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바깥은 해가 살짝 기울어 푸른빛이 돌기 시작했다. 나는 적당한 때에 인사를 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 인스타 알려주세요.” 내 옆에 앉아 줄곧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던 고등학생 친구가 팔로우를 요청했다. ‘우와! 나의 첫번째 고등학생 친구잖아?’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지만 그래서 고마웠다. 정말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고 나가려던 그때, 네 분이 모두 일어나 한 줄로 서서 환하게 웃으며 나를 보고 인사를 해주셨다. 그 장면이 아주 짧았지만 순간 사진을 찍은 것처럼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았다. 평소에 즐겨보던 어느 잔잔한 일본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 같기도 했다.



‘나 방금 영화 속에 있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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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같은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첫날처럼 비가 왔고 아주 오래 걸었고 계획에 차질이 생겼던 날이 또 있었다. 내가 두 시간이나 걸어온 그 길은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았다. 걸을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차로 가야 맞는 길이긴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일단 식사를 하러 갔다. 사실 메뉴는 미리 정하고 왔다. 뜨끈한 황태 미역 수제비! 움츠러들었던 마음까지 다 녹일 만큼 정말 맛있었다. 수제비에 정신이 팔려 화장실에 가고 싶었던 것도 잊어버렸다. 한 그릇을 거의 비웠을 즈음 다시 익숙한 질문이 들려왔다.



“혼자 여행하시는 거예요?”



사장님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몇 차례나 했지만 매번 설렜다.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도 뻗어나가는 방향은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이번엔 어떤 방향일까.


‘출근길에 주변을 둘러봤는데 모두 같은 표정으로 빽빽한 지하철 속에서 흔들거리고 있었어요.’, ‘가끔 모두가 언제든 화낼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물론 그 속에 있던 저도 그렇고요.’


잠깐이었지만 그 대화에서 사장님과 나는 무척 닮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결이 닮은 사람을 발견하면 본격적으로 수다에 발동이 걸린다. 하지만 대화가 막 깊어지려던 그때 가게가 조금 바빠졌다.



“며칠 뒤에 숙소를 이쪽으로 이동해요. 그때 또 올게요!”

긴 여행의 특권이다. 좋았던 곳에 또 갈 수 있는 [한 번 더 찬스!]가 있다는 것.







며칠 뒤 나는 숙소를 식당이 있는 동네로 옮겼다. 비구름도 연휴의 인파도 지나간 한가로운 낮에 정말 다시 찾아갔다. 사장님은 그때 하다 말았던 이야기의 끝을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다. 정확히 그 지점에서부터 다시 이어갔다. 이미 결이 비슷하다는 걸 알고 있는 우리는 자연스럽게 수십 가지 주제를 넘나들었다. 나이도 살아온 배경도 모두 달랐지만 이번에도 역시 좋은 대화였으므로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각자의 경험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아- 그 기분, 알죠’라는 자연스러운 공감이 오갔다.



그동안 내 앞에 놓인 것들도 몇 번 바뀌었다. 처음엔 바지락 라면으로 시작했고 그다음엔 사장님이 내어주신 커피와 맥주가 있었다. 커피와 맥주는 일종의 [수다시간 연장 아이템]이었다. 장황했던 수다의 끝에서 우리는 “꼭 귀엽고 멋진 할머니가 되기를!”하고 서로의 무척이나 귀여울 노년 라이프를 응원했다.







여행의 마지막날, 숙소의 호스트님과 차담을 나누었다. 호스트님은 “다른 분들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즐겁게 이야기했는지 알겠어요. 꼭 사촌동생이 놀러 온 것 같아요.”라고 하셨다. 나는 이 말이 유독 칭찬으로 들렸다. (원래도 나는 나를 재밌다고 해주는 말에 쉽게 신이 나는 타입이다.)



서울로 돌아온 후 하동에서의 시간을 곱씹어 보았다. 즐거웠다. 그러니까 더 정확히 말하면 답장을 바라지 않고 편지를 썼는데 예상치 못하게 전부 답장을 받은 것처럼 즐거웠다. 여행 전의 울적했던 마음, 그 다음 장에는 하동에서의 기억이 쓰였다. 그 소중한 기억은 걱정이 만든 것도 계획이 만든 것도 아니었다. 물론 나를 짓눌렀던 고민들이 여행 후 곧바로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다정함과 친절함은 상대도 나도 함께 북돋아 준다는 것. 그리고 나는 정말 듣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이 사실들은 언젠가 또 어떤 고민을 해결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단서로 쓰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도 계절도 알록달록 어쩔 줄 몰랐던 봄에서 여리지만 더 짙어질 초록빛으로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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