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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영화, 그 안락한 고요

<천국보다 낯선> (1984)

by FEELM

*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과 생각을 담았으며, 영화 <천국보다 낯선> 대한 일부 스포일러가 있을 있습니다.




천국보다 낯선 (1984, Stranger Than paradise, 미국/독일(구 서독))


감독/각본 - 짐 자무쉬
음악 - 존 루리
출연 - 존 루리, 에스터 벌린트, 리차드 에디슨 외 다수
제작 - 시네서시아 프로덕션
배급 - 더 새뮤얼 골드원 컴퍼니


장르 - 드라마

시놉시스 - '신세계(The New World)'. 뉴욕 빈민가의 낡은 아파트에 사는 윌리에게 어느 날 사촌 에바가 찾아온다. 갑자기 군식구를 떠맡게 된 윌리는 처음엔 그녀를 성가셔 하지만 10일이 지나 에바가 떠날 무렵이 되자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낀다.

'1년 후(One Year Later)'. 1년 후 윌리는 친구 에디와 함께 에바를 만나러 클리블랜드로 무작정 떠난다. 괴짜 로티 아주머니와 함께 사는 에바는 핫도그 가게 점원으로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세 사람은 함께 플로리다로 떠나기로 한다.

'천국(Paradise)'. 이들의 여정은 개경주에서 윌리와 에디가 가진 돈을 거의 다 날리게 되면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남은 돈을 털어 경마에서 마지막 승부를 걸고 있을 때 에바는 우연치 않게 큰 돈을 손에 넣는다. 윌리와 에디를 기다리던 에바는 결국 혼자 공항으로 떠나고, 세 사람은 뿔뿔이 흩어진다. 언제 도착했건 이방인이기는 마찬가지인 이민자들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보여주는 화려하고 꿈같은 파라다이스와는 거리가 멀다. 신세계의 꿈을 안고 도착한 에바에게 이 거대한 나라는 뉴욕이건, 클리블랜드건, 플로리다건 간에 쓸쓸하고 황량할 뿐이다.


유독 흑백 영화가 보고 싶은 날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바깥세상에는 수많은 대상들이 존재하고, 그들 각각의 색채가 존재한다. 색채들은 우리의 일상에 다채로움을 선사하는 반면, 때로는 피로를 불러오기도 한다. 모든 것들이 강렬하고 선명한 자극으로 다가오기에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무엇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없게 흐릿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시달린 저녁이면 항상 나는 모든 것을 잠시 잊어버리고 흑백 영화만이 줄 수 있는 고요함 속에 몸 담그고 싶어진다.


흑백 영화는 고요하다. 사물들조차도 조용하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 속 주인공의 표정과 몸짓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특히 흑백의 클로즈업신에서는 때로 손쉽게 인물의 얼굴의 주름살의 형태나 심지어 속눈썹의 떨림조차도 포착할 수 있다. 해당 인물의 사적 영역에 더 가깝게 다가가는 것 같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또한, 고요함 속에서 소리는 증폭된다. 작은 물건을 떨어뜨리는 소리조차도 울리고, 바람 소리에도 귀 기울이게 된다. 단색의 화면 속의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에 우리는 한층 빠져들게 된다.


캡처.PNG 로버트 테일러와 비비안 리 주연의 1940 년 작품인 ‘Waterloo Bridge’ -마이러 역의 비비안 리


흑에도 여러 종류의 흑이 있고, 백에도 여러 종류의 백이 있다.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의 흑백 버전을 내놓으며 이야기했듯이, 흑과 백만으로 이루어진 영화 속 세상에서 우리는 무수한 흑과 백의 종류를 찾아낼 수 있고, 색채가 도드라지지 않는 대신에 영화 속 사물들의 양감과 질감에 집중하게 된다. 따라서 흑백 영화 속에서의 빛을 이용한 연출의 효과는 더욱 커지는데, 어둠과 빛의 극적 대비 때문만이 아니라, 광선 자체가 퍼져나가는 형태에도 주목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흑백의 연출을 잘 활용했다고 생각되는 영화 속 장면을 하나 꼽으라면, 나는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천국보다 낯선> 속의, 눈보라가 치는 이리호를 바라보는 주인공 세 사람의 모습이 담긴 씬을 고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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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세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챕터인 ‘신세계’에서는 맨해튼에 사는 월리에게 사촌 여동생 에바가 찾아오고, 뜻밖의 사정으로 그의 집에서 10일간 머물게 된다. 도박꾼인 월리는 그러한 에바를 달갑지 않게 여기지만, 막상 그녀가 떠나고 난 뒤에 혼자 남은 집에서 적적함을 느낀다. 두 인물의 눈빛과 텅 빈 공기 속 오가는 무미건조한 대화에 집중하게 되는 챕터이다.


두 번째 챕터인 ‘1년 후’에서는 월리와 그의 친구 에디가 포커게임에서 돈을 딴 후에 에바가 사는 클리블랜드를 찾아간다. 그들은 영화를 보고, 포커도 치지만 모든 것이 지루하기만 하다. 여기에서 앞서 이야기한 장면이 등장한다. 삼인조는 호수를 구경하러 나가지만 호수는 눈보라에 보이지 않고, 풍경은 황량하기만 하다. 눈이 오는 날은 유독 조용하지만, 흑백 영화 속의 눈 오는 풍경은 더욱이 그렇다. 빛에 반사된 눈은 더욱 하얗게 번지고 날리는 눈보라의 거친 입자가 두드러지며, 그 가운데 칼바람을 맞으며 세 사람이 우두커니 서 있다. 적막 속의 허무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클리블랜드의 풍경 또한 뉴욕과 다를 바 없이 황량한 것이다.


챕터 3은 ‘천국’으로, 월리와 에디는 뉴욕으로 돌아가려다가 에바를 데리고 그들의 천국을 찾아 플로리다로 향한다. 플로리다로 향하는 차 안은 어느새 밤이 되어 깜깜해지고, 주변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만 그들을 비추며 아른거린다. 밤의 풍경 속에서 불빛들이 만들어 내는 효과가 그들의 고립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듯 하다. 마침내 도착한 이들은 허름한 모텔에서 머물고, 월리와 에디는 도박을 하러 다시 나간다. 에바는 홀로 해변가를 거닐다가 그녀를 마약밀수자로 오해한 남자로부터 돈 꾸러미를 건네받고, 홀로 공항으로 떠난다. 월리는 그녀를 찾아 떠나지만, 결국 셋은 엇갈려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흑백 영화의 미학은 과잉이 아닌 절제의 미학이다. 그리고 그 절제 속에서 우리는 평소에 눈여겨보지 않던 부분들을 마주하게 된다. 영화 <천국보다 낯선>은 로드무비로 자신의 천국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는 이방인들의 이야기이다.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사람들과 그 속의 미묘한 감정들을 보여주기에 흑백의 연출이 이보다 잘 어울리는 영화도 드물것이다. 불 꺼진 고요한 방안에서 이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우리 역시 결국 세상의 이방인들일 뿐이라는 씁쓸하지만 어쩌면 안락한 허무 속에 잠기게 되리라.


72기 서아영


- 이 글은 Google Play 스토어에서 무료로 열람하실 수 있는 도서 <Feelm: 2권>(서강영화공동체, 2021)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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