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교육> 서평
Ⅰ.서론
<민주주의와 교육>을 서평의 주제로 선정한 것은 듀이의 교육이론에 대해 비판을 펼쳐보겠다는 일종의 ‘객기 어린 낭만’에서 비롯되었다. <민주주의와 교육>은 가히 현대 교육학의 ‘종합 교과서’로 일컬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오늘날의 교육 현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으며, 듀이 자신이 고백하기에도 본인의 철학을 가장 포괄적이며 충분하게 제시하였다고 표현한 책이다. 고작 교육대학 학부 2학년 과정의 수준에서 이 책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조금은 예상했으며, 실제로 단순히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무릇 비판이란 완벽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올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데,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였는지도 불확실한 수준에서 이론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제시하겠다는 것이 상당히 모순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다만 예비 교사로서, 또 미래의 교육학도를 꿈꾸는 학부생으로서, 그토록 많은 교육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듀이라는 대학자의 교육이론에 대하여 탐구하고 비판해 보겠다는 무모한 도전 정신으로 시작한 이 독서가, 결과적으로 나의 학문적인 도야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간략히 소개하자면, 이 서평은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듀이가 주장한 교육이론에 대한 요약과, 이에 대한 나의 비판적인 입장, 그리고 <민주주의와 교육>이 예비 교사들에게 시사하는 점을 포함한 결론으로 이루어졌다.
Ⅱ-1. 듀이 사상의 전반(全般)
<민주주의와 교육> 서문에서 듀이는 이 책의 성격을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이념을 진술하며 그것을 실제적인 교육 문제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밝혀두고 있다. 역자의 도움을 빌리면 그의 사상은 흔히 두 가지 명제로 나타낼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이론은 실제에서 파생되며 실제로 적용되는 한에서 가치를 가진다.
(2) 이론과 실제의 괴리는 사회적 계층분열을 반영하며 그것을 영속시킨다.
명제 (1)은 지식의 의미와 성격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인식론적 명제’의 성격을 지닌다. 여기서 말하는 ‘이론’은 곧 ‘지식’의 속성을 가지며, ‘실제’는 원문의 ‘practice'에 해당하는 단어로 듀이의 입장에 맞게 해석하자면 ’실제로 하는 것‘의 속성을 가진다. 이론이 실제에서 파생된다는 논리는, 우리의 삶이 주로 실제적인 상황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실제적인 일에 종사할 때, 우리의 관심은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에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사태에 대하여 '관심(Interest)'을 가진다. 이때 우리는 사태에 대하여 무언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태에 대하여 ’알려고‘ 한다는 것이다. 듀이는 모든 이론이 실제적인 사태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유용할 때 비로소 이론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론과 실제가 괴리되어 있는 상황은 어떠한가? 이는 실제로 많은 교육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인데, 듀이는 이를 필연이 아닌 우연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이론과 실제가 별개로 취급되는 것은 그것이 원래 배타적인 성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조건으로 인해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편 명제 (2)는 앞의 명제 (1)과 달리, 사회철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앞서 논의했던 ‘이론과 실제의 괴리’를 언급하며 듀이 자신이 지향하는 사회의 모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론과 실제라는 용어를 앞서 명제 (1)에서 논의된 바로 해석한다면, ‘아는 것’과 ‘하는 것’의 괴리는 곧 사회의 분열을 가져오며, 바꾸어 말하면 듀이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이론적 활동과 실제적 활동이 일치하는 데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듀이의 말(본문 19-3)에 따르면, 이론과 실제가 괴리되어 있을 때, 실제는 단순히 물질적 관심에만 치중될 뿐이며, 이론은 이와 무관하게 뜬구름 잡는 데에 그치는 관념적 생각으로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듀이는 이와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사회’의 예로 고대 그리스를 들고 있다. 듀이의 입장에서 볼 때 이론적 활동에만 종사하는 지배층과 그에 반해 실제적인 활동에 제한되어 있는 피지배 계급이 존재했던 그리스 사회는, 비록 사회 구성원들이 이러한 체제에 대하여 마땅하다고 생각할지라도, 민주적인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Ⅱ-2. 듀이의 교육론
(1) 교육의 역할
<민주주의와 교육>의 앞부분에서, 듀이는 상당한 분량에 걸쳐 교육의 역할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제 1장은 <삶의 필연성으로서의 교육>에서, 이 장에서 듀이는 사회적 경험과 교육의 목적을 연관시켜 주장을 전개한다. 말하자면, 모든 사회적 경험은 교육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삶을 영속하려면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의사 소통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 과정에서 이른바 공동의 이해(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지향하는 가치)를 따르는 것이 요구된다. 결국 사회적 경험이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반드시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함께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교육적인 경험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물론, 사회적인 삶이 교육적 가치를 지닌다는 주장이 학교와 같은 교육 기관으로 대표되는 ‘의도적인 교육’의 중요성을 낮추는 것은 아니다. 듀이는 이를 사회의 문명적인 진보와 연관지어 이야기한다. 이전의 원시적인 사회에서는 단체 활동에서 나타나는 기초적 활동이나 집단의 풍습을 모방하는, 즉 직접적 참여로서의 교육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문명이 진보할수록, 어른(교육자)과 아이(피교육자)의 간극이 점점 커지며, 모방과 같은 직접적 참여는 어려워진다. 그래서 의도적인 기관(학교)가 나타나고, 그 내용에 따라 특별한 집단(교사)이 그 간극을 줄이는 역할을 맡게 된다는 것이다.
(2) 교육에 있어서의 경험과 사고
듀이의 교육관에 있어 ‘경험’ 과 ‘사고’라는 용어를 그의 입장에 맞추어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이 내용은 11장 <경험과 사고>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우선 ‘경험’에 대하여 살펴보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경험은 영어 ‘experience' 와 비슷하다. 듀이가 바라보는 경험은 오히려 ’experimentation(실험)‘의 의미와 가까운데, 이는 듀이가 경험의 능동적 층면을 상당히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수동적으로 어떤 현상을 ’당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을 경험했다고 볼 수 없다. 누적적이며, 실제 사태와 관련하여 의미를 지니고, 결과적으로 경험자를 변화시키는 것이 경험의 중요한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경험에서 나온 지식은 실제와 유리된 관념적인 지식에 그치게 되고 만다.
의미있는 경험을 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고’이다. 듀이는 사고를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과 예상되는 결과 사이의 관련을 파악하는 것’으로 정의하는데, 사고의 가장 큰 역할이 경험 속의 지적 요소를 드러내는 것에 있다고 본다. 사고는 우리로 하여금 행위하는 데에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게 하며, 교육적 성장에 있어 중요한 기반이 된다.
(3) 교육의 목적
위의 개념들을 종합해보면, 듀이가 주장하는 이상적인 교육은 사회 안에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사태에 대해 이해하고, 예견될 결과를 사고하여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듀이가 생각하는 ‘교육의 목적’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데, 그가 교육의 목적을 다른 일상적인 목적지향적 활동의 그것과 동일 선상에 놓아 두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듀이는 8장 <교육의 목적>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교육자도 농부와 마찬가지로 모종의 일을 해야 하며, 모종의 자원을 가지고 모종의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 이외에도 교육자의 일을 ‘타자치는 일’이나 ‘토끼를 총으로 쏘아 잡는 일“ 등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듀이가 교육의 실제적인 측면을 매우 중시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러한 생각은 듀이가 교육의 ’내재적 측면‘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실제적으로 유용한 결과를 얻지 못하는 교과 혹은 지식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며, 다르게 말하면 교과 혹은 지식은 그 자체로 내재적인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같은 <민주주의와 교육>이라는 책 안에서 듀이 본인이 자신의 말을 반박하여 마치 자가당착에 빠진 것처럼 해석될 여지가 있는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본문 4장에서 듀이는 “교육의 과정은 그 자체 이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지 않으며 교육 그 자체가 목적이다” 혹은 “교육에는 더 교육받는 것 이외에 다른 고려가 필요하지 않다” 라고 말하는데, 이는 앞서서 언급한 그의 주장과 달리 오히려 교육이 지니는 내재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교육의 목적과 수단에 관하여 듀이는 상당히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주장을 남겼는데, 이 때문에 ‘철학적 괴물’이라는 일종의 오명을 얻기도 하였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는데, 듀이의 말 중에서 ‘교육 그 자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듀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교육’은 내재적인 가치를 포함하고 있는 포괄적인 개념의 교육인가?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듀이가 주장한 이론과 실제의 관계나, 수단과 목적의 관련을 생각하여 볼 때, 이는 포괄적인 개념에서 바라본 교육이라기보다는 듀이 자신이 주장한 ‘실제적이며 현상적인 사태의 문제 해결에 유용한 교육’의 성격을 지닌다고 예상할 수 있다. 즉, 그가 주장하는 이상적인 교육의 형태를 이미 ‘교육 그 자체’라는 단어에 투영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민주적인 사회에서의 교육
7장 <민주주의 교육의 개념>에서 듀이는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 그동안 존재했던 세 가지 사회(플라톤의 고대 그리스, 18세기 개인주의 교육철학, 19세기 제도적 관념주의 교육철학)들의 모습을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듀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민주주의 사회는 한 집단의 관심이나 이해가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충분히 공유될 수 있어야 하고, 둘째로는 그 집단이 다른 구성원들과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사회이다. 이를 교육에 적용해 본다면, 이론적 활동과 실제적 활동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며, 모든 구성원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사회 변화를 도모하는, 이른바 지적 습관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Ⅲ. 듀이의 교육관에 대한 비판
종합해보면,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듀이가 답하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질문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교과는, 그리고 교사는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로 나타날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내가 갖게 된 의문점은 다음과 같다.
-듀이에 따르면, 지식(교과)은 사회 속에서 실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 과연 교육에 있어서의 형이상학적 가치들, 이를테면 동양 철학에서 자주 나타나는 ‘자기 수양으로서의 공부’ 나 ‘도덕적인 심성의 발현’ 같은 것들은 정말로 무의미한 것일까?
(1) 주희와 듀이
이것은 <민주주의와 교육> 마지막에 증보 자료로 수록된 <주희와 듀이: 교육이론의 메타프락시스> 를 읽고 가지게 된 의문이다. 이 자료에서는 존 듀이와 동양의 학자 주희의 교육관을 각각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는데, 두 이론이 보이는 가장 극명한 차이는 앞서 Ⅱ-1에서 소개했던 듀이 사상의 전반에 나와 있는 첫 번째 명제, ‘지식의 성격과 가치’라는 주제에서 발생한다. 말하자면 주희가 주장하는 ‘선한 본성의 실현’ 으로서의 지식은 듀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저 상류층의 정신적인 여가 활동에 지나지 않는, 실제와 유리되어 버린 관념적 지식일 뿐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2) 교과의 성격에 대하여
그러나, 듀이의 교육이론이 일종의 교과서로서 존재하는 현대 사회의 교육 현장에서도 여전히 주희의 이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주희가 말하는 본성의 실현으로서의 공부는 지적 활동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는데, 말하자면 ‘공부하는 것 그 자체에서 얻는 가치’를 교실의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과연 무의미한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논제이다. 일체의 교과에 대하여 탐구하고 지식을 얻는 과정에서 학생은 일종의 ‘즐거움’을 얻는다. 듀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실제적인 문제와 관련이 없는 교과는 학생들로 하여금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어떤 성격을 가지는 교과이든지 간에, 교사와의 활발한 의사소통을 통해 학생들이 ‘공부 그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을 얻는다면, 이는 실제로 학습에 있어 상당히 유용한 동기 부여의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은가?
한편,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이 상당히 경시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본다면, 교육 현장에서 형이상학적인 가치들을 탐구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반드시 필요하다. ‘인문학자’를 길러내는 교육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주로 대학 수준, 혹은 그 이후에서야 시작된다.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어떠한가? ‘돈을 많이 벌 수 없다’ 로 귀결되는, 이른바 실생활에 유용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형이상학적 가치들을 탐구하는 학문들을 경시하는 것이 실제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생각이다. 인문학이 설 자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사회는 가치의 혼란이라는 커다란 문제에 직면한다. 100년 전의 존 듀이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듀이적 사고가 지배한 교육 현장은 우리 사회가 지금 보여주는 지나치게 실용 중심적인 학풍. 그리고 삶의 가치에 대하여 생각할 여지가 없게 된 사회 이면의 그림자에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Ⅳ. 결론: 교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듀이가 주장하는 것처럼, 실제적 문제해결 활동은 교육 과정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교사는 적절한 지도와 의사소통을 통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이러한 능력들을 바르게 함양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이론적 지식을 실제와 연관하여 학생들에게 ‘전달’ 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 스스로도 자신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교과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하고, 실제적인 교육을 통하여 학생들을 어떻게 성장하게 할 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데에 중점을 두어야 할 필요성을 동반한다. 다만, 교사는 또한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듀이가 미처 이야기하지 못했던, 교사의 또 다른 역할에 대해서도 역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주희로 대표되는 동양의 교육 사상이 여기에 많은 점을 시사하는데, 학교에서 교과를 배우며 얻는 즐거움이나 성취감에서 시작되는, 배운다는 것 그 자체로 가지는 내재적 가치를 학생들에게 알게 하는 것 역시 교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로 존재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비록 교과의 성격이나, 교육을 통해 이끌어내야 할 바람직한 사회에 대해서는 그 입장을 달리하지만, 듀이와 주희의 교육이론 모두 교사에게 ‘연속성’ 에 관련된 것들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교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학생들의 일생에 걸친 연속적인 성장을 위한 ‘조력자‘로서 존재하면서, 동시에 교육이 이루어지는 과정 그 자체에서 얻는 가치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학생들로 하여금 이를 깨닫게 하는 일종의 ‘학자’로서의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