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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겸손 Nov 01. 2017

1. 회색 도시 도쿄, 그리고 건축

 


밤을 꼬박 지새우고 하네다 공항에서 도쿄 시내로 향하는 길이다. 덜컹거리는 전철 소리와 함께. 나는 우에노역에서 히비야 라인을 타야 한다. 눈 앞에 펼쳐지는 회색 빛 도시 풍경에서 차이를 느낀다. 서울의 것과 내 고향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물기를 머금은 대기. 건물로 붙어 기울어지듯 달리는 지하철의 느긋한 움직임. ‘흐음… 단지 2시간 40분 차이인데 말이지…’ 너무나도 자주 반기는 수변과 물길들 사이에서 점액질을 느낀달까? 이런 물길은 어떻게 통제했을까? 이런 저런 단어와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물의 도시, 도쿄. 미끄러지듯 건물 사이의 좁은 철로를 통과할 때는 놀랍기도 했지만. 창밖을 바라보며 놀라지 않은 것처럼 표정 관리를 하고 있지만, 마음의 소리는 ‘오… 기울어지고 있어!’라고 소리친다. 기울어진 내 몸과는 다르게 도쿄의 건축과 사물들은 단정하기만 하다.

 


내가 아이였을 때, 초등학교 1~2학년쯤일 거다. 미술 숙제를 하려고 방바닥에 누었다 앉기를 반복한 어느 날이다. 나는 꼼지락거리며 문방구 플라스틱 팔레트에 이리저리 물감을 짜 색깔을 조합했다. (*'이런저런 행동을 했다'라는 순서 기억이 있지, 세세한 모든 것이 기억나는 게 아니다.) 노란색과 파란색을 섞으니 초록색이 나오네. 길가에 핀 개나리색과 엄마가 좋아하는 보라색을 섞으면 갈색이 나온다니! 너무나도 신기했다. 물감을 이리저리 섞어대다가, 팔레트의 널찍한 곳에 모든 물감을 순서대로 짜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림 속 친구들은 까맣게 잊은 채, 아이들이 지면 위에서 계속 뛰어놀도록 내버려두었다.

 

인물들이 뛰어노는 바탕색을 칠할 차례였다. 무슨 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예쁜 색을 얻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모든 물감을 섞으면 최고의 색깔이 얻을 수 있겠지?’라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부푼 기대감을 가지고 한웅큼 짜놓은 물감을 힘주어 섞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검정색에 가까운 쥐색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컬러감이 없는 색깔이 나온다는 것에 난 상당히 충격을 받았고, 해결사인 엄마에게 SOS 구조요청을 청했다. “엄마 나 있는 물감을 다 짰는데, 어두운 회색이 나와버렸어.” 엄마는 잠시 궁리했다. 우선 만들어논 바탕색을 같이 칠하자고 말하고는 어두운 회색을 쓱쓱싹싹 칠했다. 그리고나서는 그림 뒷면에 엄마는 제목을 썼다.이렇게. '밤늦게 까지 노는 친구들'.


그 일이 있은 후, 회색은 내 인생의 한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어렸을 때 기억이 거의 없는 나에게 이 정도의 상세한 맥락이 남아있다는 것은 빨강만큼의 강렬한 경험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빨강의 깨달음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색은 회색이다. 둘째, 제목 짓기는 중요하다.  큰 가르침을 얻은 것이다.

 

그 경험 이후 나는 가장 많은 색을 숨기고 있는 것은 회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회색의 칙칙함이라니. 내가 소스라치듯 놀라던 생쥐의 색이라고!’ 참으로 아이러니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색에는 많은 색이 있다. 내가 도쿄를 바라보는 시선도 이와 유사할 것이다. 많은 색과 개성들이 두루두루 섞여 바르게 자리 잡고 있는 곳. 미끄러지듯 통과하는 지하철 속에서 나는 ‘밤늦게 까지 뛰어노는’ 회색을 다시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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