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자연을 품었던 인간, 냉장고를 품는다.

10분 전 일이다.

by 임유성

9시에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고 돌아와서 집안일을 마치고

TV 앞에 앉아서 미국 드라마를 두 편 봤다.


적당히 지루함을 몰려올 때쯤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육아휴직을 하면 그동안 악화된 몸상태를 재건하는 게 1순위 목표였다.


운동 전에 밥을 먹으려고 했더니

아침에 아이가 먹은 게 전부였다.

냉동고를 열어보니 핫도그가 있어서 소스를 세 가지나 발라서 맛있게 먹었다.


밥솥만 비었지 냉장고 속에는 먹을 것으로 가득했다.

구석구석 살펴보니 먹다만 반찬부터 언제 샀는지 모를 식재료까지 넘쳐났다.


"인류가 언제부터 이렇게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일까..."


평범한 가장, 평범한 가정.


세계가 모두 우리 집처럼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생활에 기본적인 것들이 부족한 국가도 있고,

또 풍족하다가도 모든 것을 잃어서 당장의 삶이 위태로운 곳도 있다.


이런 풍요로움을 가까이에 두고 살면서도

익숙함으로 인해 그 소중함을 잊고 살게 된다.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자연스럽게 더 상위 욕구가 발현되기 마련이지만,

그 욕구들의 방향이 올바르지 않아서 풍요 속에서도 수많은 정신질환을 앓는 사례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식재료로 가득한 냉장고를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집이라는 공간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물건들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


TV부터 에어컨, 제습기, 가습기, 선풍기, 휴대폰, 노트북, 소파, 자동차, 개인적으로 소장한 몇 가지 전자제품...


어쩌면 이제 없으면 이상한? 물건들이다.

우리가 집이라 부르는 곳에는 사람만큼 이런 물건들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다시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서 생존의 위협과 스릴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세상이 변한 만큼 우리도 변했다.

익숙한 지금의 상태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꽤나 적합하고 경쟁력 있는 상태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자연의 바람은 잊고, 에어컨 앞으로

흙과 풀의 냄새를 잊고, 카페와 헬스장으로

조용히 들려오는 세상의 소리를 잊고, 작은 이어폰.


아직 나의 본능 저 깊은 곳에는 무엇인가, 자연과 조금 더 가까이 있으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지나치게 효율을 따지거나 가벼운 소비로 위로받고, 그렇게 생존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것 같다.


유통기한을 늘려주는 냉장고,

인간의 마음은 앞으로 더 오래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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