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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하 Jan 10. 2022

돌아보니 성장통이었던 것

나의 존재가치 찾기

 디카시를 작성해 제출하는 전공 과제가 있었다. 디지털카메라와 시(詩)를 결합한 장르이다. 우리 지역의 문화유산을 소재로 디카시를 쓰는 과제였다. 찍으러 나가기는 귀찮았기에 갤러리를 한참 뒤졌지만, 우리 지역 사진이 없었다. 그래서 타 지역에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빠한테 "월영교에 꼭 내려줘야 해!"라고 하고 양심도 없이 잠에 들었다.


 월영교에 도착했더니 사람은 많고 바람은 불고 또 엄청 어두웠다. 괜히 서럽더라. 추워서 동생을 핫팩 삼아 안고 있다가 내 시야에 들어온 건 문 보트였다. 내 이과 지인들 중 유일하게 꽃핀(?) 문과생인 나로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스스로 빛을 내네?'였다. 달은 태양의 빛을 반사하지 않는가. 와중에 생각난 구절도 있다. 이정록의 <더딘 사랑> 중 '그대여/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달은 윙크 한 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 나 자신이 문이과 통합형 인재가 아닐까 생각하며 사진을 한참 찍었다. 카메라에 잡히진 않았겠지만 사실 문 보트에 타고 계신 분이랑 눈이 마주쳤다. 머쓱해서 셀피인 척했다. 아닌 거 아는 것 같길래 허리도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빛을 낸다'가 어떻게 시상이 되었냐 하면,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같은 궤도만을 돌고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위성 달은 학창 시절의 나다. 나는 내가 천재는 고사하고 노력형 인재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6년의 꿈을 포기했다. 포기가 아니라 실패였다. 나만큼 어울리는 사람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주제에 스스로 빛나는 행세를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별거 아닌데 그땐 정말 인생이 끝나버린 줄 알았다.

     

 문 보트는 정말 스스로 빛을 낸다.(빛을 위한 연료가 있겠지만.) 조금 힘들지라도 일단은 내 발이 구르는 대로 간다. 정해진 궤도가 없고 조력자라는 이름의 갑(甲)이 없다. 이건 스무 살의 나다. 윤리와 사상을 수능 과목으로 선택했던 나는 자칭 윤사 변태였다. 실존주의와 독일 철학자들을 좋아하는 열여덟의 나는 코시국의 스무 살로 자랐다. 학교도 못 가고 고전만 주야장천 읽었다. 나 분명 합격했는데. 스무 살에 알바를 하다가 문득 든 생각이 있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은 나이가 지금인데, 살면서 가장 아기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 원하는 대학 못 갔다고 다 늦었다고 생각했던 나는, 아직 아기니까 리셋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응애.

   

 나는 아직까지도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걷겠다는 다소 중2병스러운 생각으로 산다. 그래서 성인 되고 나서 부어라 마셔라 노는 여느 스무 살과는 다른 모습이고 싶었던 것 같다. 나를 어떤 분야에서든 성장시키고자 관심 있던 분야의 책을 마구마구 읽었다. 그게 고전이었다.     


내 존재가치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어떤 이가 내 모든 이데아였던 적도 있고, 누군가 악의 이데아임을 깨닫고 마구 도망친 적도 있다. 노자는 고정되고 영원한 실체는 없다고 하지 않았나. 제법무아라고 했다. 나도 계속해서 변해가겠지. 변하지 않는 것을 최고선으로 인식하는 말이지만, 나는 변화라는 키워드가 마음에 든다. 어떤 것에서든지 변화하면 그건 곧 성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걸 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같이 나아가겠지. 가끔 보면 너무 환상만 좇는 것 같지만 아직 어리니까 봐주자.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을 굉장히 독립적인 존재로 정의한다. 이 세상에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혼자 내던져진 존재가 인간이다. 사물과 달리 태어난 이후에 자신을 만들어나간다. 나는 이 부분에 몰입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뉴턴의 F=ma만큼이나 완벽한 공식이라 생각한다.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는 말은 나를 도리어 열정적으로 살게 한다. 껍데기 안이 좋았던 내가 그 밖에서 이제 모든 것에 몸을 부딪히며 살아본다. 가끔은 다 던져버리고 싶고 하루정도 인생 파업하고 싶다. 이불이랑 떨어지기 싫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철없는 어린애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성장통     

이제는 너 스스로 빛난다

이제는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다

이제는 같은 자리만을 맴돌지 않는다

이제는 가고 싶은 곳으로 맘껏 굴러간다




돌아보니 성장통이었던 것

스무 살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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