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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23. 2019

박물관을 짓자, 최종병기 활

눈에 보이는 것들의 성찬

박물관을 짓자최종 병기 활   

   

영화 <최종병기 활>(김한민, 2011)과 <푸른 소금>(이현승, 2011)을 봤다. 인터넷으로 다운을 받아서 두 편 연속으로 봤다. 영화에겐 미안한 일이다. 영화관에 가서 종합예술 대접을 못 한 것에 대해선 사과한다. 영화든 소설이든, 서사의 구성 요소로서의 박물(博物)은 필수다. 이야기라면 어떤 식으로든, 정보 공급처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게 이야기의 오래된 사회적 기능이고 효용이다. 물론 지금은 ‘최종 병기’급 대접을 받지는 못한다. 소설이나 영화 말고도 유용한 정보 제공처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찾는 사람은 예나 제나 거기서 새로운 정보를 찾는다. 신기한 것일수록 좋다. 그래서 이야기 예술은 체계적으로 한 우물을 파서 독자나 관객이 원하는 그 ‘새로운 정보’나 ‘감추어져 왔던 정보’를 속속들이 알게(느끼게) 해 주려고 노력한다. 생존과도 직결되어 있는 것이라 그것을 외면할 수 없다. 가능만 하다면 작품 안에 작은 박물관 하나쯤은 들어앉아 있어야 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관객이나 독자의 호응을 제대로 얻어내려면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반복하지만, 그게 서사 장르의 운명이다. 영화라고 해서, 화면 중심이라고 해서, 그 의무가 완전히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자칫, 그 소명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면 감독(제작자)의 행로에 큰 제동이 걸린다.  

   

두 영화 다 제목만 봐서는, 하나는 활 박물관이고 다른 하나는 소금 박물관이어야 한다. 그런데 <푸른 소금>의 제목이 해석학적 코드가 아니라 상징적 코드 쪽에서 운용되는 바람에(감독의 의욕 과잉이 아닌가 싶다) 박물관 성격이 좀 오락가락했다. 제목을 확실히 제압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주 전시품이 요리였다가 총이었다가 한다. 어쨌든 두 편 다 ‘박물관’ 수준은 기대 이하였다.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라는, 광고 문구 덕에 더 유명해진 아포리즘적 대사 때문에, 늙은 이야기꾼의 일원으로서 활 박물관에 대한 기대가 컸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무망(無望)이었다. 일단 제목에는 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활이 ‘최종병기’가 되어야 하는 확실한 ‘한 칼’이 없었다. 이를테면, 주된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결정력을 가진 화기(火器)’가 되는 상황이나(<신기전>), 주인공이 ‘인간적 성숙’에 그것이 ‘최종적’으로 기여하는 정황(<와호장룡>의 청명검) 같은 것이 설득적으로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곡사(曲射)나 애깃살 정도의 신기(新奇)로는 많이 부족했다는 느낌이었다. 적어도 활 제작 과정이나, 활과 화살의 구성과 상호작용, 인체와 기물(器物) 사이의 상호작용, 숙련도에 따른 활쏘기 능력의 차별성 같은 것을 좀 더 확실하게, 세밀하게, 묘사해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남이(박해일)가 자기 혼자(스승도 모르게) 무예를 익힌다는 것(그것도 입신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은 아무래도 리얼리티가 많이 결여된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무기를 쓰는 무예는 다 그렇겠지만, 특히 활과 같은 예민한 기물을 쓰는 무예는 고비고비마다 도움을 주는 스승이나 선배의 가르침이 없이는 일이십 년 내에 경지에 이르기 어렵다. 더군다나, 영화에서는 주인공 남이가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의 무공은 더욱더 설득력이 떨어진다. 최종 병기로서의 활은 그야말로 실전 무기다. 주로 집체적 살상을 도모할 때 사용되는 집단 무력(무기)이다. 그게 막강한 개인 전투력으로 전이되는 데에는 좀 더 용의주도한 배려(복선)가 필요했다. 혼자서 곡사 연습을 부단히 했다는 것만으로는 좀 부족했다. 살의(殺意)를 가지고 빠르게 움직이는 적과 생사를 걸고 싸우는 것과 고정된 피사체를 두고 매일 같은 장소에서 연습을 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무예 영화를 만들 때에는 감독이 무예에 대한 어느 정도의 소양은 갖추어야 하는 것이 관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할 것이다. 그런 점은 <푸른 소금>도 마찬가지였다. 전직 사격 선수를 등장시켜서 소금 총알이나 개머리판 잘라내기 정도의 신기를 보여주는 것으로는 영화가 재미있는 공부 거리를 제공하지 못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서사 장르가 ‘재미있는 공부 거리’를 멀리하고는 성공한 적이 없다.   

     

두 영화가 그래도 좀 볼만했던 것은 악역을 담당한 배우들의 재미있는 연기와 화면을 구성하는 아기자기한 볼거리들이었다. 크게 섭섭할 정도는 아니었다. 짜임새 있는 플롯이라든지, 소설을 방불하는 인과성과 전체성 같은 것은 애당초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실망 거리도 없었다(만약 그런 것이 있다는 입소문이 돌았으면, 이번처럼 집에서 다운받아서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모르겠다. 이 영화들을 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가까이서 보니까 더 시원찮게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영화는 가까이서 보면 안 된다. <미션 임파서블4>(브레드 버드, 2011)를 1열 좌석에서 보다가 혼이 난 적이 있었다. 스토리도 안 잡혔고, 액션도 안 살았고, 서스펜스는 아예 없었다. 눈만 아팠다. 30분만 기다렸으면 다음 영화를 기다려 중간 열에서 볼 수 있었는데 그걸 못 참고 입장한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그 영화도 역시 영화 속 ‘박물관’은 별로였다. 형편없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편들을 모두 본 사람이라면 오히려 감독에게 이런저런 훈수를 두고 싶을 지경이었다. 전작(前作)들에 반드시 등장하던 ‘불패의 강적’도 이번에는 실감 나게 등장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보라는 것인지, 여주인공의 육체미 빼고는, 전혀 알 수 없도록 하는 영화였다. 그것도 나는 영화를 너무 가까이 놓고 본 까닭으로 여긴다. 그래야 덜 억울하다.          

너무 비판적으로 영화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영화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깎아먹은 것이 아닌가 싶어 반성도 된다. 영화는 엄연한 인문학이다. 아껴야 한다.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환상’이 왜 우리에게 ‘최종 병기’가 되는 것이고, ‘소금’처럼 인체 구성에 필수적인 것인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볼까 한다. 이야기가 전적으로 철학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으니 그쪽에 악감정이 있으신 독자는 더 이상 읽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래야 덜 억울하다.     

본디 내 손 가까이 있는 것에는, 뻗으면 닿는 것들에는 욕심이 덜 나는 법이다. 사람도 그렇고 물질도 그렇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도 일단 내 손안에 들어오면 한풀 꺾인다. 탐이 덜 난다. 음식도 앉은(선) 자리에서 먹으면 꿀맛인데 포장해서 집에다 놓고 보면 영 맛이 떨어질 때가 많다. 옷도 그렇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과 내 옷장에 들어있는 옷은 같은 옷이라도 전혀 다른 옷이다. 무엇이든, 내 안에 들어올 때는 다 싱거운 모양이다.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의 관계도 그런 것 같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항상 박대당한다.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은 필요 이상으로 대접받는다. 멀리 있기 때문이다. 그것 이외의 다른 이유는 없다. 그래서 물질보다 정신이 늘 중한 대접을 받아온 것이라면 지나친 망상일까?     

눈에 보이는 것을 박대하는 전통은 동서를 막론하고 그 역사가 깊다. 희랍 시대의 아낙사고라스는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기 때문에 세계는 정돈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 이후의 모든 서양식 관념론적 세계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들은, 모두 그의 아바타에 불과하다. 이왕주 교수의 『철학풀이, 철학살이』라는 책에서 그런 내용이 알기 쉽게 잘 설명되고 있다. 그 내용에 몇 마디만 첨가해서 그대로 옮긴다.       


...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에서 라이프니츠, 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철학자들은 결국 이러한 세계관의 소유자들이었다. 비록 그들이 아낙사고라스의 누스(정신)를 여러 기발한 명칭들로 바꿔 부르기는 했지만 아무도 그의 관념론에서 이탈해 본 적은 없었다. 이를테면 이데아, 부동의 원동자, 단자, 이성, 자아, 세계정신, 절대자 등 아무리 거창한 용어를 동원하는 경우에도 그 세계관의 차이는 모두 오십 보 백보 안에 있었다. 그들 모두,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기 때문에 세계는 정돈되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물론 동양 철학의 주자학, 노장 철학, 양명학 등도 관념론의 또 다른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세계를 지배하는 정신적 원리, 즉 태극이나 도, 이와 기 등은 어떠한 이론의 틀 안에서 전개되든지 결국 동양의 누스들이다(물론 표현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아낙사고라스의 누스는 어쨌든 서양의 태극이다>). 양의 동서가 다르고 시의 고금이 나누어지기는 하나 이 세계관이 보여주는 세계의 모습은 대동소이하다. 물질은 정신 뒤에 있거나 그림자로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이 보여주는 대담함은 철학이라는 이름을 빌미로 겨우 용서받을 만한 것이다. 이를테면 빤히 보이는 이 책상이나 볼펜, 꽃병, 스탠드 등은 <사유의 눈>으로 바라보니, 있는 게 아니라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일 연구실이나 세미나 장에서가 아니라 시장 바닥이나 운동장에서라면 그런 말들이 결코 제정신을 갖고 하는 소리로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왕주, 『철학풀이, 철학살이』 중에서]   

       

그런데, 살다 보면, ‘체험, 삶의 현장’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전혀 정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연구실이나 세미나장에서 만들어진 것들을 교실에서 배우고, 어른이 되어 삶의 현장에 비로소 나섰을 때, 우리는 잔인한 그 ‘삶의 진실’ 앞에서 속절없이 당황하고 무기력해진다. 진리는 너무 멀리 있어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는 것을 알고 좌절한다. 그래서 유물론을 찾는다. 인간 기계론과 실존주의가 나오고, 행동만이 내 존재를 보장한다고 믿는 이들이 속출한다. 인간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는 예수의 말도 어느 유물론자에게는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빵이 아닌 다른 것이라는 게 결국 다른 종류의 빵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빵은 신이니 영혼이니 의식이니 하는 수상한 이름이 붙어 있어 마치 빵과는 달라 보이지만 결국은 그것도 빵이라는 것이다. 가장 세련된 형태의 유물론인 마르크스주의도 결국 이러한 세계관에서 더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로 소설가들이 그쪽 전도사로 많이 활동한다.  

     

 ... 오늘날 육체는 더 이상 생소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알고 있다. 가슴속에서 고동치는 것이 심장이고, 코는 허파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육체에서 밖으로 돌출한 호스의 끝이라는 것을. 사람의 얼굴은 소화시키고, 보고 듣고 숨 쉬고 생각하는 육체의 모든 기능이 집결되어 있는 일종의 계기판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이 자기 육체에 붙어 있는 모든 것을 명명할 수 있게 된 이래 육체는 인간을 덜 불안케 한다. 또한 우리는 영혼이란 것이 회색빛 덩어리의 뇌 활동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육체와 영혼의 이원성은 학문적 개념으로 감싸이게 되었다. 오늘날 이러한 이원성은 시효를 잃은 선입관으로서 우리는 흔쾌히 그것을 조소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위의 책에서 재인용]        


그러나, 그것도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의 일생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깨닫게 된다. 그래서, 또다시 ‘생물(生物)’을 찾는다. 오랜 전통이다. 자연(自然)과 생태(生態)에 귀의하고, 노장(老莊)을 찾고, 생명사상이라는 누스를 또 만든다. 당연히 생물학적 인간관이, 진화론이 다시 활개를 친다. 인간의 이타심도 이기적 유전자 때문이라고 강변을 한다. 그게 종횡 구분의 오류에 기반한 역설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그것들로도 역부족이다. 인생은 ‘설명’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보상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내장(內藏)한다. “왜 사느냐?”는 물음이 본체가 만들어질 때부터 내장 하드에 이미 식재(植栽)되어 있다. 모니터와 본체도 하나로 붙어있다. 인생에서는, 그것들이 각각 따로 노는 것들이라면, 무슨 설명을 통해 연결되어야 하는 것들이라면, 이미 순정 부품이 아니라고 보면 된다. 간혹 버그가 끼어드는 경우가 있긴 해도 그것(삶의 목적) 없이 태어나는 인간 본체는 없다. 본체와 분리되지 않는 그 내장 하드를 진화론 같은 외장 하드로 대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본디 외장용에는 추동력이 없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외부적인 것들로는 그 물음(왜 사는가)에 답을 낼 수 없다. 외장 하드는 항상 보충용이거나 비상용일 뿐이다. 본체가 없으면 그것 자체로는 운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 역시 만족할 수 없는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다.     

그래서 생각한다. 현재까지 우리가 윈도우(窓)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본체의 추동력은 ‘환상’밖에는 없다. 인간에게는 환상을 보는(꿈꾸는) 능력이 있다. 인간은 자신이 본 환상으로 삶을 설계해 왔다. 당연히 환상 없이는 현실도 없다. 윈도우 자체가 환상이다. 그것 없이는 어떤 그림도 우리에게 보여질 수 없다. 그래서 종교가 있고, 윤리가 있다. 그러한 불패의 환상만이 오직 구원이다. 이야기는 그것들을 실어 나르는 최종적인 수레다. 환상을 거역하는 자들과 싸우는 최종병기다. 환상은 늘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지만 그래서 포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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