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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23. 2019

내 안의 두려움

무외시(無畏施)

불가(佛家)의 교훈 중에 무외시(無畏施)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시(法施), 재시(財施)와 함께 삼시(三施)의 하나라 부르고요. 남을 해치지 않으며, 중생에게서 온갖 두려움을 없애 주는 일을 그렇게 이릅니다. 타인에게 깨달음을 주거나 재물을 베풀거나 두려움을 없애도록 돕거나 하는 것이 중요한 불가 수행이라는 것을 저는 최근에 알았습니다.     

이번 달에 배달된 한 검도 잡지를 보다가 문득 그 말이 눈에 띄었습니다. 특집으로 도장훈(道場訓)이나 소년검도단의 단기(團旗)에 기재된 교훈적인 말들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기검체(氣劍體), 소진백련(素振百鍊), 조단석련(朝鍛夕鍊), 수파리(守破離) 등 검도 수련에서 늘상 강조되는 격언들에서부터 자강불식(自彊不息), 거경궁리(居敬窮理), 살활자재(殺活自在), 광사덕성(狂事德成), 일장일이(一張一弛) 등 상당히 철학적인 문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었습니다(‘광사덕성’에는 ‘미쳐야 미친다’라는 뜻이, ‘일장일이’에는 ‘완급조절’이나 ‘강약조화’의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유난히 ‘시무외(施無畏)’가 돋보였습니다. 그 격언이 불가의 무외시(無畏施)에서 차용된 것임을 알게 되니 그 의미가 더 각별했습니다. 제가 검도를 처음 시작할 때 생각했던 것이 바로 ‘내 안의 두려움’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을 ‘한 놈과의 사투'라고 불렀습니다. 그 싸움을 하느라 저의 청춘 시절을 모두 허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이 먹고 뒤돌아보니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말이 각별할 수밖에요. 그런데 오늘 페이스북을 순례하다 또 그 말을 봤습니다.  

   

"무외시(無畏施) : 법보시는 어느 경지에 도달해야 행할 수 있는 일이고, 재물 보시야말로 하고 싶지만 여건 따라 사람을 왜소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래도 있으면 하면 좋지. 그도 저도 못하면 두려움을 없애주는 선한 행위가 으뜸가는 보시라 한다. 오늘 공양간 앞에 붙은 방이다. 따뜻하게 말하며 손잡아주고 부드러운 눈으로 그윽이 쳐다봐주고 하는 말에 장단 맞추며 귀 기울이고 당신이 세상에서 최고라고 치켜세우며 예의를 다하고 피곤한 나그네에게 편안한 평상을 내어주는 그가 혹은 그녀가 지금 죽으려 마음먹다가 나의 환한 얼굴빛 때문에 그 두려운 마음을 거두어들였다면 그보다 더한 보시가 어디 있을까?" [정다경, 페이스북, 2014. 2. 10]  

  

좋은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시무외를 높이 두지 않고 낮게 실천의 경지로 삼아 두는 마음이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내 안의 두려움이 다 가시지 않았는데 내 어찌 타인의 두려움을 해소시켜 줄 수 있겠는가?"라고 등 돌리고 목탁이나 두드리고 앉았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법입니다.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야 하는 게 인생일 것입니다(굳이 보시라는 말까지 쓸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 소개해 드렸던(졸저 『장졸우교』 참조) 헨리 제임스의 「정글 속의 짐승」이라는 소설이 생각납니다. 그 부분을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 헨리 제임스의 소설 「정글 속의 짐승(The Beast in the Jungle)」은 한 남자의 불운과 불민(不敏)을 그린다. 그에게는 남모르는 고통이 있다. 그는 늘 자신의 모든 행동은 결국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예감과 불안에 시달린다. 그는 한 번 지나온 길이 아니면 발을 내디디지 않는다. 누군가 자신의 앞장을 서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야 안전하다. 혼자서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는 순간, 숨어있던 정글 속의 야수가 별안간 뛰쳐나와 자신을 물어뜯을 것이라는 불안,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한순간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라는 그 터무니없는 불안 속에서 산다. 자신도 그것의 터무니없음을 안다. 그러나 아는 것만으로는 언제나 불충분하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 그는 그 짐승들을 끝내 물리치지 못한다. 자신의 내부를 장악하고 있는 그 ‘짐승의 시간’과 정면으로 대적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오직 상처 받지 않는 삶을 위해 급급히 살아가는 외길이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그는 어느 순간 허무라는 더 큰 짐승 앞에서 꼼짝없이 좌절하고 만다. 모든 새로운 것들, 모험적인 사랑과 도전적인 출발을 도외시한 삶, 그는 문득 허무하게 생의 한 먼지로 부유(浮游)하고 있는 초라한 자신을 발견한다. 진짜 짐승은 바로 그 허무였다. 나이 들고 더 이상 새로운 것들이 눈앞에서 어른거리지 않을 때 진짜 짐승은 홀연히 나타난다. 사랑스러운, 사랑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는, 한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만(그녀가 죽고 난 후의 상처가 두려워 결혼하지 못한) 그는 그렇게 사랑했던 그녀가 죽고,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아무런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는 (허무한) 자신을 모습을 발견하고, 그리고 후일 그녀의 무덤가에서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아온 한 사내의 ‘사랑했던 여인을 애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다는 것을, 고통도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누구에게나 공평히 나누어줄 수 있을 만큼, 생(生)이 마련해둔 보상은 그렇게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권택영, 『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일부 참조). [졸저, 『장졸우교』, 165-166쪽]  

  

여담 한 마디 하겠습니다. 제가 제 안의 ‘짐승의 시간’에 대해 처음 적은 것이 아마 『고양이 키우기』라는 중편소설에서였을 겁니다. 그 이전의 소설에서도 조금씩 그런 이야기가 새어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겠습니다만 본격적으로 그것을 테마로 쓴 것은 그 소설이 처음이었습니다. 악전고투, 어렵게 처음 고양이를 키워 본 경험에서 저의 ‘상처의 투사’를 읽어내는 작업이었습니다만, 그리 만족스러운 결과는 얻지 못했습니다. 신문 연재소설이라 고료가 적지 않았고 고맙게 읽어주신 몇 분 선배님들의 격려에 힘입어 힘들게 몇 줄 써내긴 했지만 결국은 ‘방어’에 급급했었다는 느낌만 줄 뿐입니다. 

문제는 자기를 해체하고 나와 남의 경계를 한꺼번에(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일에 성공하는 것인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아, 이건가? 싶을 때도 하지만 오래가지 않습니다. 태어난 것만으로도 크게 성공한 것으로 알고 이 세상 모든 걱정 근심이 그저 팔자려니 하고 순순히 살아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착한 제자들이나 모아 운동이나 짬짬이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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