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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25. 2019

점집을 찾는 이유

탈현실화의 감정

점집을 찾는 이유   

  

현실은 종종 ‘믿기에는 너무 참혹한’ 사실을 전달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때로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삶을 유지하는 올바른 방도가 될 때도 있습니다. “산으로 들어간다”라는 말이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라는 말이 바로 그런 ‘올바른 방도’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보통 엄청난 에너지를 지닌 채 <내가 여기서 보는 것은 진짜가 아니다>라는 감정이, 즉 <탈현실화의 감정Enfremdungsgefühl>이 몰려옵니다. 그것에 대한 심리학의 설명을 조금 들어보겠습니다.  

   

... 이 탈현실화는 (주목할 만한 현상이지만) 아직 그 정체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감각>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특수한 정신 내용에 부착되어 있고 그 내용에 대한 결정과 결부되어 있는 복잡한 과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현상은 정신병에서 자주 발생하지만 정상인들 사이에서도 없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따금씩 건강한 사람들에게서도 환상이 발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현상은 확실히 어떤 기능의 마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꿈이 건강인들에게 정규적으로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질환의 모델로 사용되듯이, 그것은 비정상적인 구조를 나타냅니다. …<중략>… 여기서 잠시 멈추고 이런 종류의 방어 기제 중 한 작은 예를 당신에게 상기시켜 드릴까요? 당신은 스페인계 무어인들의 그 유명한 탄식, <슬프도다, 나의 알하마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보압딜 왕이 그의 도시, 알하마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어떻게 접하고 있나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황이 이미 그의 통치 기반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사실이도록 내버려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소식을 <도착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기로 결심합니다.     

그에게 편지가 당도했다네,

알하마 시가 함락되었다는.

그는 편지를 불 속에 집어던지고,

사신(使臣)을 살해했도다.    

 

왕이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무력감을 어떻게 해서든 퇴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태우고 사신을 살해함으로써 그는 아직도 절대적 권력을 쥐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보여 주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프로이트(박찬부), 『쾌락 원칙을 넘어서』, 열린책들, 215~219쪽. 인용자 일부 수정]     


환상을 만들어내어서 ‘탈현실화 감정’을 위무(慰撫)하는 사회적 제도 중의 하나가 점(占)이 아닌가 싶습니다. 용하다고 소문난 점집을 찾아가든, 아니면 주역을 펼쳐놓고 스스로 동전을 던져서 육효(六爻)를 보든, 점을 본다는 것은 지극한 탈현실화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효과를 얻게 합니다. 점괘가 어떤 것이든 환상을 부추기는 것은 사실입니다만(스스로 점을 볼 때는 점괘를 반대로 해석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물을 건너면 죽는다”를 “지금 건너지 않으면 죽는다”로 해석합니다. 전제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점이라는 완충지대를 설정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해쳐서라도(소식을 전한 자가 자신이므로) ‘소식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로 되돌리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가 어려서 점쟁이 골목에서 자랐다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억울한 일로(그것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호된 추궁을 받는 일이 생긴다면(자기 자신의 자책감까지 포함해서) 부담 없이 점집을 한 번 찾아보시는 것도(주역을 읽는 것도) 한 좋은 방편이 될 것 같습니다. 사회적인 체면 관계로 그런 행차가 불편하신 분들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주역』 강의를 한 번 들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궁해져서 원칙에 돌아가야 하는’ 나이시라면 더더욱 권합니다.

<2014. 3. 25.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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