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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25. 2019

지상의 사랑, 천장지구

유덕화와 오천련

지상(至上)의 사랑천장지구   

  

“25살에 죽은 한 여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름답고 총명했으며, 모차르트와 바흐를 사랑했고, 비틀즈 그리고 저를 사랑했습니다.” 눈 덮인 스케이트장 관중석에 혼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이렇게 독백을 한다. 영화 『러브스토리』(아서 힐러, 1970)의 첫 장면이다. 20년 뒤 홍콩에서 또 한 편의 『러브스토리』가 나온다. 『천장지구(天長地久)』(진목승, 1990)가 그것이다. 홍콩판 『러브스토리』, 『천장지구(天長地久)』는 우리나라의 『맨발의 청춘』과도 많이 비슷하다. 우리 쪽에서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와도 친연성이 있다. 신분이 낮은 남자 주인공과 신분이 높은 여자 주인공 사이의 비련(悲戀)이 우리 쪽에서는 조금 더 자연스럽다.      

어쨌든 이 영화는 워낙 유명하다. 유덕화, 오천련이 한창 때 출연해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게 된 계기가 된 영화이기도 했다. 또 하나, 내용과 잘 연결이 되지 않는, 천장지구(天長地久)라는 어려운 제목도 화제였다.  『영웅본색(英雄本色)』, 『첩혈쌍웅(牒血雙雄』 등, 흔히 말하는 홍콩 느와르가 그 절정기의 영화(榮華)를 접고, 장려한 낙일도 없이 그저 한갓 야산(野山)의 낙조(落照)로 저물어갈 때, 마지막 생명의 불꽃들이 늘 그러하듯 강렬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킨 정통 느와르 영화였다. 여전한 홍콩 반환의 그 세기말적 분위기(타나토스)가 짙게 깔리고 유덕화와 오천련이라는 새 얼굴들과, 새로운 감각의 연출, 사실적인 소재의 차용(기존의 느와르가 가진 과장(誇張)이 많이 사라졌다) 등이 함께 잘 어우러져 비교적 높은 완성도를 보인 영화로 평가되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서사구조는 전형적인 『선녀와 나무꾼』이다. 부잣집 딸과 사창가 창녀의 아들로 태어난 불량배 청년 사이의 사랑이 그냥 순탄하게 진행될 리는 없다. 어느 나라에도 그런 신분을 넘어선 ‘순탄한’ 러브스토리는 없다. 소년기 풋사랑을 아름답게 그린 황순원의 「소나기」는 말할 것도 없고,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이야기, 하다못해(미국은 평등사회다) 미국의 『러브스토리』에서도 그들을(그들의 행복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순순히 헤어지는 것도 용납이 안 된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꼭 죽인다. 『러브스토리』에서는 가난한 풀빵 장수의 딸 제니(알리 맥그로우 扮)가 죽는다. 올리버(라이언 오닐 扮)와 제니가 <I give you my love, more precious than money>,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라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던 대사들이 지금도 아련하다(고등학교 1학년 때 문화교실로 본 영화다. 그때 알리 맥그로우에게 반하지 않은 놈들은 남자가 아니다). 보석상 떼강도와 불운의 인질 사이로 만난 아화(유덕화)와 죠죠(오천련), 이 두 사람의 사랑도 결국 남자의 비참한 죽음으로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다. 그들의 사랑을 보듬어줄 ‘하나의 거대한 에로스’ 같은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파국(破局)의 예감만이 가득한 홍콩에서 그들의 애절한 사랑을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아화가 죠죠에게 가지 못하고 길바닥에서 처절하게 경련하며 숨지는 마지막 장면이 너무 가슴 아팠다. 30대 중반, 그때로는 그런대로 볼 만했던 영화였다. 그런데 뒷맛까지 깔끔하지는 않았다. 영화는 재미있게 봤지만, 내게는 그 영화의 제목과 파블라(이야기 요소들)가 빚어내는 돌연한 불협화음이 불쾌했다. 왜 하필이면 ‘천장지구’여야 하냐는 것.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다’는 직역도, ‘천지는 장구하다’라는 한문식 조어법도 우리 식 ‘맨발의 청춘’ 이야기와는 영 접점(接點)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몇 해를 보냈다. 그러다가 우연히 한 책 (최명, 『소설이 아닌 삼국지』)을 읽는 중에 그것이 본디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천장지구(天長地久)가 노자의 원전에서 백락천의 「장한가」로 내려앉을 때, 반란에 가까운, 모종의 변이(變異)가 이루어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천장지구’라는 말은 가계(家系)가 좀 복잡한 말이었다. 본디 철학 쪽 혈통인데 본의 아니게 문학 쪽으로 입양이 되면서 뜻이 정반대로 변하게 되었다. 철학에서 문학으로 그 함축이 미끄러지면서 전복이 된 것이다. 이 말을 처음 쓴 노자는 “천지가 장구한 것은 (인간과 달리)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문맥에서 사용된 ‘천장지구’가 백락천의 시에 와서는 “천지가 아무리 장구하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그 끝이 있겠지만, 우리의 (이 비극적인) 사랑의 한은 도저히 그 끝을 볼 수가 없다”로 사용되었다. 일종의 부정되는 전제로 사용된 것이다. 처음 뜻과 정반대의 뜻을 강조하는데 사용되었다. 노자의 말에서는 비교가 허락되지 않는 최상의 가치를 뜻했는데, 백락천의 시에 와서는 더 중요한 것(인간의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 부정당하기 위한 전제(희생타)가 되고 말았다. 어디서나 큰놈을 하나 때려잡아야 존재감이 산다, 백락천이 천장지구를 때려잡으면서 강조하고 싶었던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의 사랑과 정(情)’이었다. 우주가 아무리 장대하고 무궁하다 해도 인간이 없으면, 그들 간의 사랑과 다정이 없으면 없어도 그만인, 아무런 소용이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휴머니즘이다. 당연히 진목승 감독의 영화  『천장지구(天長地久)』는 백락천 시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아주 적손(嫡孫)이다.    

  

이미 ‘천장지구’는 노자가 말한 ‘장구한 하늘과 땅’이나 ‘사심 없이 살아라’와 같은 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말이 된 상황이었다. 백락천 이래로 그 말은 오직 ‘비극적인 사랑의 한’이라는 뜻, 그 하나에만 접속하는 메타포일 뿐이었다. 굳이 직역을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취향을 맞춘다면 ‘천지가 아무리 장구하다 할지라도’ 정도로 옮길 수 있을 정도였다. 어쨌든 ‘천장지구’는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렵게 어렵게 내 협량한 문식력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온 것이다. 그게 재미있어서 10년 정도 그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울궈먹었는데, 한참 뒤에 도올 김용옥이 TV 노자 강의 때 그 『천장지구(天長地久)』를 인용하는 것을 봤다. 도올 선생은 노자 강의의 취지에 맞추기 위해서 아예 백락천은 생략하고 자기 주장을 펼친다. 노자에게서 바로 『천장지구(天長地久)』라는 영화로 넘어와서 영화를 노자 사상을 전파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일종의 ‘의도의 오류’에 속한다고나 할까? “이 ‘천장지구’라는 이름은 별로 심각한 의미부여가 없다.”라는 말에 이어서, “그러나 이들이 빌고 있는 순간의 영원은 사실 가장 비노자적인 천장지구였다. 그러나 이러한 찰나적인 비극적 정조의 배면에 깔린, 인간이 동경하는 보편적 정서 속에는 분명 하늘과 땅의 장구함이 배어있다.”라고까지 말한다.     

    

“천장지구!” 『노자』의 일곱째 가름은 이 말로 시작하고 있다. “천장지구!” 우리에게 퍽으나 낯익은 이름이다. 그러나 이것이 유덕화(劉德華, 리후 떠후아)가 나오는 홍콩 액션 무비의 이름이라는 것은 알아도, 이것이 정확하게 『노자』에 출전을 둔 심오한 철학적 개념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사람은 드물다. […중략…] 그런데 왜 하필 불량배 유덕화와 청순한 오천련(吳倩蓮, 우 치엔리엔)의 사랑을 그린 이 영화제목이 “천장지구”인가? 주윤발의 『영웅본색』이나 정우성의 『비트』나 다 같은 주제의 영화들인데 여기엔 왜 이렇게 심오한 이름이 붙었을까?<중략>

사실 진목승(陳木勝)감독이 붙인 이 천장지구라는 이름은 별로 심각한 의미부여가 없다. 보석상을 터는 과정에서 우연하게 피치 못할 운명으로 맺어진 두 젊은 남녀의 사랑, 날카롭고 정의로운 인상을 주는 아화,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가냘프고 청순한 죠죠, 이 두 어린 생명들의 극적인 사랑의 순간이야말로 “천지처럼 장구하다” 즉 “영원하여라”라는 예찬의 율로지(eulogy)에 불과한 것이다. 피 튀기는 칼싸움에서 태연하게 죽어가는 아화는 하늘에서의 영원(天長)을 희구했을 것이다. 그 순간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천주교 성당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죠죠는 이 땅에서의 영원(地久)을 갈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빌고 있는 순간의 영원은 사실 가장 비노자적인 천장지구였다그러나 이러한 찰나적인 비극적 정조의 배면에 깔린인간이 동경하는 보편적 정서 속에는 분명 하늘과 땅의 장구함이 배어있다.     


꿈꿔왔던 청춘이

바람에 흩날리고

자신도 모르게 얼굴엔

슬픔만이 가득찼네.

자연의 변화가

새 생명을 만든다지만,

처량한 비는

날 고독하게 만드네. […중략…]

사랑하는 연인이여

청춘은 죽음이 두렵지 않네

청춘의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는데,

슬픔의 그림자가

그대 얼굴에 드리워지네.[…후략…]     


천(天)은 장(長)하고 지(地)는 구(久)하다! 이것은 아화(유덕화)와 죠죠(오천련)의 사랑의 장구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화와 죠죠의 사랑을 포함한 모든 사랑, 그러한 사랑을 잉태시키고 있는 모든 생명체의 공동체 의식, 그 공동체 의식의 근거로서의 장구한 천지를 노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과 같은 환경론적 불안감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천지는 장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인(Sein)이 아닌 졸렌(Sollen)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이 아닌 당위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말한다. 모든 당위가 구극적으로는 사실이다. 천지는 장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장구하고, 또 장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어떠한 장난도 천지 앞에서 무기력한 것이다. 그렇다면, 천지는 어떻게 해서 장구할 수 있는가? 노자는 말한다. 천지가 장하고 또 구할 수 있는 것은(天地所以能 長且久者), 바로 “부자생(不自生)”하기 때문이다.[중략] “자생(自生)”하면 “스스로 생한다”의 뜻이 됨으로 노자사상의 맥락에서 좋은 뜻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자생”이란 그와 반대되는 뜻으로 “자기를 고집한다,” 즉 “자기라는 동일성의 체계를 고집한다”는 뜻이다.[중략] 노자는 말한다. 천지가 장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천지가 자기를 고집해서 생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러한 대로 자기를 맡기는 것을, 왕필은 “천지임자연(天地任自然)”이라고 표현한 것이다.[중략] 노자는 다시 말한다. 천지가 장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사(自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사한 인간들이여! 어찌 천지처럼 장구하기를 바랄손가!  (김용옥, 『노자와 21세기』중에서)   

  

한학의 대가인 도올 선생이 백락천을 모를 리가 없다. 중당(中唐) 시인 백거이, 그 백락천을 도올이 모르다니, 그건 말이 아니다. 백락천은 이백(李白)· 두보(杜甫)· 한유(韓愈) 등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거물이다. 도올이 백락천을 모른다는 것은, 마치 빵 좋아하는 사람이, ‘달로와요’나 ‘포숑’까지는 몰라도, ‘뚤레쥬르’나 ‘파리바케뜨’가 유명한 빵집 체인이라는 걸 모른다는 것과 한가지다. 그건 식견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모르는 것은 용서가 되지만 틀리는 건 안 된다”는 우리 교사들의 기본 태도다. 그러니, 아화와 죠죠의 사랑이 중요하지 않고 그것을 포함하는, 잉태하는, 모든 생명체의 공동체 의식, 그것의 기반이 되는 천지야말로 중요한 것이고 또 장구해야 하는 것이라고 선생이 강변하는 것은 아주 계산된, 고의적인, 고도의, 자뻑(?)이라고 봐야 한다. 글 중간에 삽입된 주제가 가사(천약유정)야말로 누가 봐도 '백락천'인데, 굳이 그걸 넣으면서까지 자승자박을 한 의도가 어디 있겠는가. 달리 없다. '노자'가 주제니까 그냥(걍!) 밀고나간 거다.  

    

사족 하나. 백거이는 800년 29세 때 최연소로 진사에 급제했다. 이어서 서판발췌과(書判拔萃科)· 재식겸무명어체용과(才識兼茂明於體用科)에 연속 합격했다. 그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학사(翰林學士)· 좌습유(左拾遺) 등의 좋은 직위에 발탁되었다. 〈신악부 新樂府〉· 〈진중음 秦中吟〉 같은 풍유시와 〈한림제고 翰林制誥〉처럼 이상에 불타 정열을 쏟은 작품을 창작한 것도 이때이다. 808년 37세 되던 해에 부인 양씨(楊氏)와 결혼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편 시 〈장한가 長恨歌〉에는 부인에 대한 작자의 사랑이 잘 반영되어 있다. 백거이는 유명한 애처가였다.

사족 둘. 진목승 감독이 처음 이 영화를 만들었을 때의 제목은  『천약유정(天若有情)』(A Moment of Romance)이었다. 홍콩에서는 그 이름으로 개봉되었다. 그 뒤 우리나라나 일본으로 수출될 때 제목이 바뀌었다. 배급사 측의 누군가가 그렇게 제목을 바꾼 것이다(모르긴 해도 고전에 나름 식견이 있는 이였던 것 같다). 아무래도 ‘천장지구’가 더 줄거리를 잘 함축한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새 이름이 좋은 반응을 얻자 그 제목으로 계속 밀고 나갔다. 

사족 셋,  『천장지구』는 전편의 인기에 힘입어 후편과 후후편이 제작되었는데, 모두 <선녀와 나무꾼>식 인물 패턴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높은 물 여성과 낮은 물 남성’의 인물 설정이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애절한 사랑을 두고 백락천이 ‘천장지구’라는 말을 (노자에게 빌려서) 쓰게 된 연유하고도 정황상 맞지 않는데, 아무래도 이야기 전승의 힘이 영향을 끼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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