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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30. 2019

얼굴 좀 생긴 것들은

각광증후군

얼굴 좀 생긴 것들은각광증후군   

  

“남녀 없이, 얼굴 좀 생긴 것들은 꼭 한 수 접어주기를 바란다니까요.” 친하게 지내는 후배가 언젠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런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선뜻 그 말에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제가 아는 ‘얼굴 좀 생긴 것들’은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고, 제 의지와는 관계없이(사실 저 스스로도 ‘얼굴 좀 생긴 것’으로 자부하고 있었거든요) 그 친구의 말이 제 머릿속을 왔다 갔다 하는 중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보지 못한 그런 낌새들이 대인 관계 속에서 한두 개씩 보이기도 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니 사실은 ‘얼굴 좀 생긴 것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부 좀 좋은 것들’도 그랬고, ‘목소리 좀 좋은 것들’도 그랬고, ‘키 좀 큰 것들’도 그랬고, ‘몸매 좀 좋은 것들’도 그랬습니다. 자기 신체에 자부심 가진 것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한 수 접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우연히 들은 말 한 마디 때문에 사람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인간들이 매일 매일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세상에는 ‘한 수 접어주기를 바라는 것들’로 가득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옛날 학창 시절 연극반에서 배운 연극 실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연극 무대에서는 맡은 배역에 따라 배우가 들어오고 나가는 방향과 서 있는 위치가 정해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역을 맡은 공주나 왕자는 항상 무대 오른 편에서 등장하고 그녀를 시중드는 시녀나 시종은 항상 왼쪽에서 등장합니다. 서 있는 위치도 그런 식으로 고정됩니다. 주인공들은 또 항상 정면을 향해 말합니다. 마치 자기 곁의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 없다’는 투입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얼굴 좀 생긴 것들’(대표로 그렇게 부르겠습니다)에게는 그들 연극의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모종의 ‘무대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일종의 각광증후군이 있다는 거지요. 일상에서도 매사 무대 조명을 의식한다는 겁니다. 자기들의 위치(위상)가 무대 중앙에 미리 정해져 있는 것으로 여기고, 그들 ‘얼굴 좀 생긴 것들’은 언제나 사건 진행이 자기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물정을 좀 알만한, 점잖고 교양 있는 식자층에서도 그런 식의 자아도취증, 나르시시즘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런 자들의 각광증후군 때문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고요.      

그런데 사실, ‘각광 증후군’ 중에서 가장 꼴볼견인 것은 따로 있습니다. 자기 신체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그것은 애교로 봐 줄 수 있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난히 ‘색(色)’을 밝히고 어떤 식으로든 그 방면에서 실적(?)을 올리는 자들의 각광증후군은 거의 범죄 수준입니다. 사실상의 사회악입니다. 공동체에 심각한 해악을 끼칩니다. 한 선량한 인간의 삶을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만(추남이며 꼽추인 남자 제자가 아름다운 여교사를 유혹하는) 그들 색계의 주연배우들은 언제나 무대 중앙에서 자신의 색을 발산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그들이 자신을 관철하는 방법은 매우 미묘하고 복합적인 과정을 거칩니다. 그야말로 콤플렉스(복잡한 것) 그 자체입니다.   

  

... 그래서 요조(『인간 실격』의 주인공)가 다음 단계로 사용하는 방어기제가 다름 아닌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이다. 투사적 동일시는 자신의 위험한 속성을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밀어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그러한 속성을 끌어낸 다음, 그를 조정함으로써 자신의 충동을 조절하려는 시도다. 예컨대 요조는 여자를 자극해 자신에게 빨려들게 해 놓고 막상 성 관계에 들어가서는 자신을 여자에게 겁탈당하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여자가 나쁜 역할을 하게끔 무의식적으로 유도해 자신은 선량한 희생자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김혜남)]     


‘각광 증후군’을 가진 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투사적 동일시라는 방어기제를 전문적으로 사용합니다. 상대를 유혹자로 만들어 자신을 유혹하게 하는 것이지요. 자신은 그 유혹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사회적 비난과 같은 일체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모든 것을 면제받습니다. 그들이 쓰는 기술은 보는 이로부터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교묘하고 능란합니다. 인격이나 교양으로 위장되는 수준이 거의 혼연일치의 경지입니다. 일단 그의 마법(?) 안으로 들어가면 꼼짝 못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그의 투사적 동일시의 각본대로,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감미로움에서 벗어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그들은 어느 집단 안에서든 반드시 한 명 이상의 상대 성(性)에게서 ‘유혹’을 받아냅니다. ‘요조’라는 소설 주인공이 그런 면모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도 살아오면서 그런 ‘각광 증후군’ 색계 주연배우들을 수도 없이 많이 봐 왔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들 색계의 주인공들 중에는 ‘얼굴 좀 생긴 것들’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얼굴 좀 안 생긴 것들’이 더 많습니다. 얼굴 이외의 매혹이 더 결정적이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모든 심리 질환이 대개 그렇습니다만, ‘각광 증후군’은 한 평생 같이 가는 것입니다. 남자의 경우는, 노인대학에서까지도 그런 주인공들이 큰 활약을 보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어 무덤에 묻혀서도 여자 귀신들 사이에서 살고(?) 싶다고 할 것입니다. 이른바 고질(痼疾)입니다. 그것이 불패의 불치병이 되는 이유는 어릴 때 거절당한 상처가 너무 깊게 나 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주로 경쟁력 있는 동생을 둔 형이나 언니에게서 많이 발견된다는 사실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다음의 설명도 이해에 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그러나 이 모든 방어기제는 요조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인간 구실을 못하는 열등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요조는 성인이 된 후 이 험난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음을 발견한다. 그러자 요조는 ‘회피(avoidance)’와 ‘퇴행(regression)’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회피는 위험한 상황이나 대상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요조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회피한다. 그는 사회로 뛰어들기보다는 방 안에 틀어박혀 사회를 비웃고 경멸하는 쪽을 택한다. 즉 그는 사회를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기력한 패배자로서의 자신에 대한 열등감이 남는다.

이 열등감을 방어하기 위해 그는 어린 시절로 퇴행한다. 퇴행이란 심한 좌절을 겪을 때 현재보다 유치한 과거 수준으로 후퇴하는 것을 일컫는다. 요조는 구강적 시기로 퇴행하여 술과 담배를 입에 달고 산다. 엄마의 젖을 빨듯이 담배를 빨고, 술에 취해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듯한 느낌에 젖어 사는 것이다. [『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김혜남)]     


열등감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열등감을 넘어서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상처에서 진주가 영글듯이, ‘승리하는 인간’이 되기도 합니다. 동일시, 상징화, 승화, 합리화, 대체 형성, 이타주의와 같은 성숙한 방어기제들의 도움을 얻어 불안을 극복하고 ‘승리’와 ‘평안’이라는 ‘두 손의 떡’을 모두 얻을 수도 있다고 프로이트 선생은 가르칩니다. 그러나, 문제는 늘 남습니다. 정작 이 이야기가(자기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은 이런 글을 읽지 않는다는 겁니다. 설혹 읽는다 해도 우이독경입니다. 스스로를 깨뜨리기 전에는, 그 어떤 치유의 말도 전혀 체내로 흡수되지 않습니다. 그들 사로잡힌 영혼들의 세상은 전혀 다른 차원에 따로 존재합니다. 그러니 그들 앞에 서면 어쩔 수 없이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주 앉아도 차 한 잔 나누지 못하고 그냥 일어서야 합니다. 서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저는 담배를 끊어서 다행입니다. 술도 못 마셔서 천만다행입니다. 엄마 젖을 빨거나, 엄마 품에 안겨서 산다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어서, ‘퇴행’이라는 낙인을 면할 수 있어서, 정말이지 천만다행입니다. 그렇지만 찝찝한 게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각광(脚光) 증후군’에 대해 쓸데없이 너무 많이 안다는 게 좀 불안하고요(용어까지 만들면서), 과도하게 글을 많이 쓰면서 늘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도 좀 불안합니다.

<오래 전 작성,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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