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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30. 2019

수상한 영화, 수상한 그녀

환상이란 무엇인가, 최류탄과 타임머신

환상(幻想)이란 무엇인가수상한 그녀


요즘 자주 헷갈리는 게 하나 있습니다. 여자 나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나이와 함께 얼굴도 잘 분간을 못합니다. 며칠 전 한 바깥 모임에서 큰 실례를 저질렀네요. 초면인 한 여자분(50대 중반)을 구면인 다른 분(30대 후반)으로 착각하고 편하게 인사말을 건넸다가 “우리 초면 아닌가요?”라는 면박을 받았습니다. 옆에서 그 사정을 간파한 동료의 도움으로 오해는 풀렸습니다만(나중에는 그렇게 젊게 봐 주셔서 기분이 좋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이제 감각(시각)마저도 믿을 수 없는 진짜 늙은이가 된 모양입니다.

무려 스무 살이나 젊게 보이는 그 여성분이 저에게 하신 말씀이 재미있습니다. 요즘 60은 옛날 40에 해당된답니다. 모두 다 그 기분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이가 좀 더 든 제가 그쪽을 그렇게 젊게 보는 것도 큰 무리가 아니라는 말이었습니다. 잠깐 혼돈이 왔습니다. 호적상 나이의 70%가 진짜(?) 나이라는데 과연 그것이 현실 나이인지 환상 나이인지가 헷갈렸습니다. 어쨌든 환상이라도 좋습니다. 모두 그렇게 환상을 가지고 살면 그게 현실이 되니까요(문득 2002년 월드컵 4강이 생각납니다). 겸해서 “환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푸코 같은 이는 역사나 소설이나 오십보백보라고 말합니다. 둘 다 환상이긴 마찬가지란 주장입니다. ‘현실에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느끼는 상념(想念)’을 부추기는 것이라면 역사든 소설이든 크게 보아 동일한(그 ‘본적지’가 같은) 기록행위인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현 ‘주거지’가 서로 다르다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런 이야기에 현혹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파고들다 보면 ‘인간은 허구다’라는 데까지 가야 끝이 납니다. 사람이 허구니 사람을 둘러싼 모든 게 또 허구일 수밖에 없고요. 그러면 애초부터 현실이니 환상이니 하는 구분도 필요 없는 게 됩니다. 별로 생산적인 논의는 아닌 것 같습니다.


 <수상한 그녀>를 지루하게 보고 나왔습니다. 환상은 환상인데 뭔가 좀 미진했습니다. <별에서 온 그대>처럼 본격적인 ‘환상’을 소재로 삼았는데 디테일이 너무 준비가 안 되어서 산전수전 다 겪은 저 같은 ‘늙은 말(영화 좋아하는 노인)’에게는 거의 고문에 해당하는 지루함을 선사했습니다. 그렇게 지루한 영화를 보면서도 두어 번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제가 참 한심스러웠습니다. 최류탄 중의 최류탄인 ‘불쌍한 우리 어머니’를 들이대는 데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누구라도 회춘(환생)한 어머니에게 “젊게 한 번 신나게 살아보세요.”라고 하지 않을 자식이 세상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자식들의 소망을 무시하고 핏줄을 살리기 위해서라며 다시 현실로 어머니를 부릅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판타지가 아닌 것 아닌가요? 그런 뻔한 삼류 멜로, 삼류 최류탄을 관객을 향해 던지는 감독의 후안무치가 괘씸했습니다. 하여튼 잔소리꾼인 저와는 달리, 같이 영화를 본 아내에게는 꽤 재미있는 영화였던 모양입니다(본인도 회춘을 학수고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오면서 바로 스마트폰 검색을 해서 400만 돌파 소식을 제게 전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도 꽤나 열렬한 반응을 보냈습니다. 별에서 온 그대가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났으니 오죽했겠습니까? 급기야 <수상한 그녀>와 <별에서 온 그대>가 막상막하의 작품이라고까지 마음대로 점수를 매겼습니다. 인터넷 검색이라도 또 했는지 요즘 세상에서는 ‘환상’이라는 코드를 버리고서는 영화든 드라마든 그 어떤 것도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라고 단정하기까지 했습니다. 이거 완전히 도사 앞에서 요령 흔드는 모양새 아닌가요? 


소설이든 영화든 사건을 다루는 것이기에(서사행위는 반드시 ‘사건의 변화’를 전제합니다) 역사물이든 판타지든 어쩔 수 없이 실제라는 객관적인 팩트(facts)를 기본적인 전제로 설정해야 합니다. 출발은 언제나 현실이라는 거지요. 처음부터 현실과 완전히 유리된 사건들은 보통의 독자나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합니다. 상상력은 코울릿지의 말대로 1차적인 것과 2차적인 것이 있어서 1차적인 것을 생략하고 바로 2차적인 것으로 넘어가면 평균적인 독자나 관객들은 금방 따라 잡지 못합니다. ‘사건의 변화’가 어떤 합리적인 인과관계 안에서 이루어질 때 독자나 관객들은 이야기에 쉽게 동화됩니다. 다만 최초에 판타지가 제시될 때를 잘 넘겨야 합니다. 그것만 잘 넘기면 그 다음부터는 천편일률적으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수상한 그녀>는 ‘청춘 사진관’이라는 마법의 공간을 잘 활용해서 비교적 그 부분을 무난하게 넘긴 것으로 생각됩니다.


판타지는 아니지만 대체역사로 판타지 욕구를 대리 보상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그런 경우입니다. 영화에 제법 관객이 들자, 한 일간신문에서 역사학자 두 사람을 불러 “광해군은 어떤 정치지도자였나?”에 대한 지상 토론을 게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의 주제인 “정치지도자는 무엇보다도 백성을 사랑하는 자여야 한다”에 비추어 광해군의 애민(애족) 통치철학을 논해 보는 것은 당연히 신문이 다루어볼 수 있는 토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제적 층위’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그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스토리텔링의 진위에 대한 타박이라면 사실 그런 토론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영화 속의 역사적 사실들은 모두 허위이므로 영화의 주제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정말이지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영화는 논리적 코드가 아니라 심미적 코드(사회적 코드가 기생할 수도 있는)의 지배를 받는 예술적인 창작품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회적 코드(정치, 경제, 문화)가 심미적 코드에 기생할 경우에는 그 형태가 아주 극단적인 양상을 보이기 마련입니다. 심청이가 죽은 몸으로 다시 부활하고(孝行), 흥부는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를 심어서 ‘대박’이 나고(善行), 춘향이도 기생의 딸로 태어나 정경부인이 되는 것입니다(貞節). <수상한 그녀>에서는 70난 할머니가 스무살의 앳된 처녀로 환생하기도 하고요. 그런 극단적인 ‘환상’이 가능한 것은(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들 효행이나 선행, 정절과 같은 사회적 코드가 소설(판소리나 영화)이라는 심미적 코드에 기생(寄生)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나 <수상한 그녀>도 당연히 그런 관점에서 ‘이해’되고 ‘양해’되어야 하는 영화입니다. 


젊어서 역사소설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데뷔작 중의 하나인 「가라도(伽羅都)」와 그 다음 작품이었던 「고비(古碑)」가 그런 관심의 소산이었습니다. 나중에 ‘대체역사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 개념이 생겼습니다만, 국내에선 제가 그런 소설(요즈음 말로 팩션)을 처음으로 선을 보였지 싶습니다. 「가라도(伽羅都)」는 사다함과 무관의 죽음을 같이 한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고비(古碑)」는 광개토왕비 비문 조작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었습니다. 둘 다 역사적 기록의 공백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메꾸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전자는 위작 시비가 있었던 <화랑세기>의 등장으로, 후자는 비문 조작의 증거가 없다는 중국 역사학계의 발표로 그 소설 속에서 제가 주장한 ‘역사적 진실성’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의의도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라시대의 성(性)풍속(특히 왕실을 둘러싼)에 대한 <화랑세기>적 스토리텔링은 당시 제 입장에서는 꿈도 꾸기 어려웠습니다. 광개토왕비 조작설에 대해서는 일본 측 사료(史料)에 대한 보다 자세한 검토가 뒤따르지 못했던 준비 부족이 큰 결격 사유였습니다. 그 뒤로는 아예 역사 족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환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수상한 그녀>는 당연히 환상입니다. 모두가 꿈꾸는 환상입니다. 저도 지금 20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수상한 그놈'으로 살면서 이것저것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것들을 마음껏 해보고 싶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그런 마음이 굴뚝처럼 치솟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제 현실이 미워졌습니다. 다시 늙은 어머니로 돌아와야 하는 '수상한 그녀'가 너무 불쌍했습니다. 그런 ‘수상한 그녀’ 때문에 내 현실이 더 미워졌습니다. 그런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가 지루할 수밖에요. 정말 야속하군요. 우리는 최류탄이 아니라 타임머신을 원하는데 감독은 연신 최류탄만 날립니다. 그래야 돈이 벌리니까요. 명색이 예술한다는 자가 오직 돈 벌 궁리만 하는군요. 정말이지 괘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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