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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01. 2019

연장이 무기가 되려면, 올드 보이

생각의 전능과 몸

연장이 무기가 되려면올드 보이 外 

       

영화 <올드 보이>(박찬욱, 2003)만큼 큰 화제가 된 영화도 없다. 지금도 주인공 오대수의 ‘15년 만두’는 코미디 프로의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이 정도면 고전(古典)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은 일단 ‘충격’이고 ‘판타지’여야 한다라는 것을 잘 보여준 영화였다. 15년 동안 만두만 먹는다는 설정이나, 갇혀 지내는 동안 막강한 무공(武功)을 쌓아서 장도리 하나로 전문 싸움꾼들을 일망타진하는 장면이나, 근친상간을 축으로 전개되는 미세하고 교묘한 스토리라인이나, 모두 충격과 환상을 ‘낯설게 하기’로 잘 사용한 예가 된다. 물론 잘 빚은 항아리에도 어디엔가는 흠이 있다. 이 영화에서는 출연자들의 대사가 많이 허전하다. 인물 묘사나 장면 묘사가 대사의 허접함 때문에 점수가 많이 깎인다. 영화에 등장하는 대사나 장면이 일상에서 유행어가 되거나 단골 패러디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영화가 그 소임을 다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영화 <올드 보이>는 자신이 누리는 성가(聲價)에 비해서 그쪽에서의 공헌이 너무 없다. <친절한 금자씨>(박찬욱, 2005)의 “너나 잘하세요”나, <친구>(곽경택, 2002)의 “마이 뭇따 아이가”, “니가 가라, 하와이”, <신세계>(박훈정, 2012)의 “목숨만은 살려 드리죠”, <변호인>(양우선, 2013)의 “국민이 국가입니다!”와 같은 대사는 이를테면, 당대의 ‘슈퍼키’로 작동했던 명대사였다. 현실의 답답한 상황을 그 슈퍼키들이 ‘한 방’ 뚫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런 슈퍼키들을 공유하면서 대중들은 ‘당신들의 천국’을 조롱하고 멸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올드 보이>에서는 그런 기억에 남을 대사를 찾기 어렵다. 우진(유지태)의 “사람은 말이야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거래. 상상을 하지 말아 봐, 엄청 용감해질 수 있어” 같은 대사는 영화를 책으로 읽는 사람들에게는 명대사라고 평가될 수 있을지 몰라도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지루한 대사다. 그렇게 길고 사변적인 것들은 ‘슈퍼키’가 될 수 없다. 간단명료하면서 정곡을 찔러줘야 한다. 무엇이든지 그런 것들이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 그러나, 자기 생각을 남에게 집어넣으려는 긴 대사들은 것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때와 장소, 그리고 사람을 가려서 작동한다. 아무 때나 세상의 모든 닫힌 문들을 다 열 수가 없다. 그 부분이 좀 아쉽다. 옥에 티라고 할 밖에 없다. 그 대신 <올드 보이>에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여럿 있다. 그중의 하나, ‘장도리’ 장면을 조금 살펴보자.   

   

영화 <올드 보이>에서, 15년간의 억울한 감금생활에서 벗어난 오대수(최민식)가 장도리 하나를 무기 삼아 처절한 복수극을 펼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영화 안에서는 나름 리얼리티를 부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많은 인원과 장시간 엉겨서 싸우려면 순발력, 지구력, 임기응변(상황대처) 능력 등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어야 하는데 영화에서는 오대수가 이미지 트레이닝과 근력운동만으로 그것들을 몸에 익히는 것 설정된다. 웃기는 일이지만,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절대 고수가 된다는 콘셉트는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이 ‘생각만으로 다 이룰 수 있다(생각 안에 갇혀 산다)’는 편집망상을 바운드 모티프(필수 동기)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비현실적인 설정이 아니다. 우진(유지태)이 편집망상이면 대수(최민식)도 편집망상이어야 한다. 생각만으로 사는 자들, 편집 망상에 사로잡힌 자들(대수는 우진에 의해 그렇게 길들여진다)끼리의 대결에서는 오히려 리얼리티가 넘치는 설정이다. 관객들이 처음에는 헛웃음을 치다가도 결국에는 오대수의 무공을 어떻게든 용인한다는 것은 그러한 영화의 내부 골격을 무의식 중에 승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하나, 만약 그러한 오대수의 변신에 관객들이 희열감을 느꼈다면, 결국 망상의 전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예술적 효용의 당당한 한 대목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 장도리 혈투 장면은 일단 장면 상으로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못이나 박는 목수의 연장이 그렇게 일격필살의 살벌한 무기로 재탄생되는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놀라고, 또 공감한다. 그것이 좁은 공간에서 싸울 때 유용하다는 것, 그리고 파괴력 있는 ‘순간 파워’를 뿜어낸다는 것을 이해하고 곧 무기로서의 장도리를 인정하게 된다. 무기는 무자(武者)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수단으로서의 효율성이 높은 것이 진정한 무기라는 것을 그 장면은 여실히 보여준다. 문득 “총기는 제1의 생명이다”라는 구호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작은 소동이 생각난다. 아마 계급 좀 높은 친구(사단장급?)가 그랬던 모양이다. 생명은 기본적으로 모두 가지고 있는 거니까, “총기는 제2의 생명이다”가 맞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했다. 체육관이 두 개 있으면 무조건 하나는 제1체육관, 다른 하나는 제2체육관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기계적 발상이다. 그래서 우왕좌왕했다. 지금은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겠다(노는 걸 봐서는, ‘제2의 생명’일 공산이 크다). 그 말은 본디 강조를 위한 과장된 어조가 첨가된, 선동적인, ‘구호’였다. “군인은 ‘사람(민간인)’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그 말은 본래 과장법이 사용된 말이다.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병사에게는 총기가 첫째가는 생명이다”를 줄인 말이 “총기는 제1의 생명이다”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취지를 모르는(이 친구는 국어 공부가 좀 부족했음이 분명하다) 무식쟁이가 하나가 그렇게 초를 친 것이다. 논리 상 ‘제2의 생명’이 맞다고. 그 친구한테 “첫날밤을 보내는 새신랑에게 제1의 생명이 무엇인가?” 만약 그렇게 물었다면 무어라고 대답했을지 궁금하다. 그래서 군대 생활에서도 인문학이 중요하다. 또, 그래서 자고로 선무당이 생사람을 잡는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어쨌든, 하급 무자(武者)들은 무기에 신경을 많이 쓴다. 실력에 자신이 없으니까(자기 실력의 전모를 잘 모르니까) 좋은 무기에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자기를 잘 아는 고수들은 그렇지 않다. 무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상대에 따라서 자기 주변에서 효율적인 무기를 골라다 쓴다. 때로는 나뭇가지 하나 꺾어 써도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무기의 주인이 무기를 감당할 만한 힘이 없으면 천하 보검 청명검도 한갓 무용지물이다(와호장룡). 중요한 것은 몸과 마음의 경지다. 몸은 항상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생각이 인간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과 반대다. 그 몸에 정직한 것이 우선이다. 그래서 좋은 스승은 제자에게 선뜻 무기를 먼저 주지 않는 법이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땔감 마련하면서 3~4년은 보내면서 몸의 소리를 듣게 한다. 자기 몸과의 대화가 자유로울 때 무기를 손에 들 자격이 생긴다. 칼을 드니 도끼보다 가볍고 창보다 길다. 평지를 걷는 일이나 산을 뛰어오르는 일이 둘이 아니다. 몸이 무자가 되면 무기는 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연장이 무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로는 또 <신용문객잔>(이혜민, 1992)이 있다. 예상 밖의 무기가 등장하는 설정이 <올드 보이>보다는 한결 자연스럽다. 중국 무협영화에서 일반적으로 절대고수는 ‘절대로’ 숨어 있다. 꼭 막판에 나타난다. 그것만 한 반전이 없다. 항상 산 넘어 산, 강 건너 강인 것이 무협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막판에 등장하는 절대고수는 식칼을 무기로 쓰는 주방장이다. 그는 자기가 쓰는 칼로, 그리고 자기 작업 방식으로, 누구도 공략하지 못하는 난공불락의 적수를 단숨에 ‘요리’해 버린다. 지형지물에 익숙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전장(戰場)의 지도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간의, 불공평한, 더군다나 고수들만이 가능한 몸 넣기(入身)의 묘(妙)가 전혀 발휘될 수 없는, 보법(步法)과 경신(輕身)의 기능이 무용지물인, 사막의 모래판 위에서의 싸움이었기에 가능한 설정이었다.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가 당대의 절정 고수 사사키 고지로(佐タ木小次郞)와의 결투를 호숫가에서의 수중전으로, 그것도 식전(食前)에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치른 것도 결국은 그의 몸 넣기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용문객잔>의 관객은 순간 어이없어하다가 이내 수긍하고 만다. 전장의 환경과 고수의 실체를 받아들인다. 이미 그전에 삶은 양(羊) 한 마리를 순식간에 통째로 썰어내는 그의 칼솜씨를 감독이 잠깐 보여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웬 무기 타령이냐고 하실지도 모르겠다. 본디 이 이야기는 내가 논술책을 쓸 때 논술 공부를 무자수업에 빗대어서 설명할 때 한 번 썼던 소재다. 이것저것 좋아 보이는 것에 한눈팔지 말고 자신의 팔뚝 힘부터 기르라는 충고였다. 그것을 좀 더 일반적인 화제로 끌어왔다. 우리 모두는 제각각의 상황에서 인생무자(人生武者)들이다. 살다 보면 기습당할 때도 있고, 자객이나 복병을 만날 때도 있다. 의용병으로 차출될 때도 있고, 유격병으로 투입될 때도 있다. 적병이 누구든, 어려운 경제 환경이든 높은 경쟁률이든 비겁한 음모든, 싸울 때는 싸워야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무기다. 무자들은 자신이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병기를 무기로 삼는다. 자신의 취향이나 신체조건, 그리고 주적(主敵)의 무기, 그리고 상대와의 거리와 결투 공간 조건 등을 고려해 칼, 창, 봉, 장, 활, 철퇴 등을 고른다. <올드 보이>의 주인공이 장도리를 고른 것도 그에게 주어질 실내의 좁은 공간을 고려하고, 접근전에서 필요한 수단을 강구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이들 영화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저 길고 날 선 무기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의 환경에 유용한, 자신에게 편하고 유리한 연장을 한두 개 갈무리 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적재적소, 잘 꺼내 쓰자는 거다. 18기니 24반이니 해서, 골고루 무기 쓰는 법, 말 타는 법, 다 익힌다고 해서, 온갖 스펙 다 쌓는다고 해서, 꼭 훌륭한 무자가 되는 건 아니다. 하나라도 잘 쓸 수 있는 연장을 확실히 챙기기만 해도 한 칼 쓸 수 있는 무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진정한 고수들은 하나의 연장으로 여러 용도에 갈음한다는 것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내공이기 때문이다. 인생무자(人生武者)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정직과 성실이다. 평소에 그 연장을 잘 쓰다 보면 급할 때 그것이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그것 모르면 바보다.     

사족. 누구든 고수가 되고 싶으면 첫째, 선생을 견디고, 둘째, 몸으로 익혀야 한다. 그 둘만 잘 지키면 누구든 자기 연장을 무기로 쓸 수 있다. 단, 좋은 선생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복불복이다. 스승을 견디라고 해서 아무나 붙들고 늘어지면 안 된다. 아니다 싶을 때는 가차 없이 버리고 혼자서 해야 한다. 오대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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