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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01. 2019

산 아래 바람처럼 살다가면

주역, 산풍고

산 아래 바람처럼 살다 가면  

   

현대의 권력은 선거를 통해 창출됩니다. 선거를 보면 권력의 속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권력이 태동되는 곳에서는 늘 바람이 붑니다.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면서 일으키는 바람이 인심을 들뜨게 하고 돈벼락이 떨어지게 하고 비정(非情)의 이합집산을 부추깁니다. 그 권력의 바람에 한 번 중독되면 인간답게 사는 일을 포기해야 합니다. 인간을 비인간으로 몰아세우는 바람, 그것이 권력입니다.

어제는 친한 친구 부부와 몇 시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환담을 나누었습니다. 카페에 앉아서 그렇게 두 집 식구만 오래 이야기를 나눈 것도 오랜 만의 일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정치하는 친구들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결론은 “정치판에서 오래 떠돌더니 모두 인간미를 상실했더라”였습니다. 행사가 있어서 모처럼 옛친구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도 예전의 진정성 같은 것은 좀처럼 보기 어렵더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주로 정치하는 친구들을 자주 만나온 친구네가 많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후원도 하고 성원도 하고 선거 운동도 많이 도왔는데 요즘 들어서는 실망감이 자주 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위로했습니다. 정치를 해서 높은 자리에 가게 되면 뇌구조가 아예 바뀌게 되어서 사람에게든 세상에게든 아예 고마움을 모르게 된다더라고 어디선가 들었던 말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제 경험을 말했습니다. 소년등과 해서 높은 자리에 올랐던 후배 한 사람이 언젠가 제 연구실까지 찾아와서 들려준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로 갑자기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서 한거할 때 고향 선배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제는 사람이 좀 보이시는가?”라고 묻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답니다. 그동안은 눈에 보이는 게 없었던 것을요. 그런 이야기를 불원천리 저를 찾아와서 하는 까닭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학교 다닐 때는 형 동생 하면서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는데 정치판에 들어간 이후로는 수십 년 동안 서로 왕래가 없었던 것을 그런 식으로 아쉬워했던 것이겠지요. 

     

본디 정치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선거가 있을 때면 ‘산 아래 바람처럼’ 순하고 선선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다닙니다. 순풍(順風)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원하던 소기의 권력을 얻고 나면 그들의 눈에서 ‘사람’이 사라집니다. 보이는 건 우중(愚衆)들뿐, ‘개, 돼지들’이거나, 그저 교언영색에 속아 달라는 대로 준 ‘생각 없는 표 한 장’들만 있을 뿐이지요.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제가 권력의 주변을 어슬렁거려 본 바에 따르면, 권력을 만드는 바람은 무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주 큰 판이거나 제 사욕이 개입되지 않는 판에서는 대체로 결과에 대한 ‘감’이 분명하게 왔습니다. 바람이 느껴지는 것이지요. 누가 이길 것인지, 어떤 편에서 대세를 가져갈 것인지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판이거나 제 사욕이 개입된 판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감이 흐렸던 결과가 많았습니다. 어렴풋한 느낌도 잘 오지 않았습니다. 원하던 방향과는 반대로 결과가 나올 때가 많았고요. 


요즘 제 주변에서 또 한 판의 선거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자문을 구하러 찾아오는 사람도 있고 자기를 밀어달라고 호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번에는 전혀 감이 안 옵니다. 전번과는 많이 달라요.”라고요. 개중에는 두 번째 출마해서 저를 찾아온 이도 있습니다. 그 분에게는 “전에는 누가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드렸죠?”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후보자들 중에서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이들에게는 “좋은 말들이 많이 들리더라.”, “자신감을 가지고 좀 더 과감하게 사람들과 소통해 보라.”와 같은 덕담을 던집니다. 아마 저와 그런 덕담을 나눈 분 중에서 누군가가 최종적으로 산 위에서 아래로 바람을 내려 보내는 자가 될 것으로 예측은 하고 있습니다만 확실한 감은 오지 않습니다. 전례를 생각해 보면, 아마 이번 선거판에 제 사욕이 개입되고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은 선거판, 특히 너무 작은 선거판에서는 표와 사람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표는 사람이 가지고 있지만 결정적인 표의 행방은 악마가 사주합니다. 아주 작은 판에서 권력을 만들어낼 때는 항상 ‘악마의 디테일’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합니다. 어디선가 나타난 ‘선거 마귀’가 기승을 부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최후의 승리까지 그들의 것은 아닙니다. 열이면 열, ‘선거 마귀’들과 함께 해서 권력을 잡은 자들은 살아서 지옥불을 봅니다. 권력은 유한하고 살아남아서 부지할 시간은 아주 길기 때문이지요. 가까이는 제 주변에서, 멀리는 나라 일에서, ‘군자유종’을 못 해서 비인간으로(제대로 사람들과 교유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예전 권력들을 지금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주역 열여덟 번째 괘는 ‘산풍고(山風蠱)’, 고(蠱)괘입니다. 경문은 ‘고는 크게 형통하고,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로우며, 법령에 앞서 사흘을 두며 법령의 뒤에 사흘을 두느니라.’(蠱元亨 利涉大川 先甲三日 後甲三日)입니다. 산 아래 부는 바람처럼, 순탄한 치자의 처세를 강조합니다. 법을 만들 때는 철저히, 단호하게 하지만 그 법을 시행할 때는 유순히, 공손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효사(효사)는 주로 아비, 어미의 일로 비유를 삼고 있습니다. ‘아비’는 뜻의 계승을 ‘어미’는 중용의 도를 강조하는 데 주로 사용됩니다.     

육오는 아비의 일을 하니 영예로우리라. (六五 幹父之藁 用譽)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163쪽]     


‘아비의 일’은 덕을 승계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야 ‘산풍’의 형세를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이번 괘가 주는 교훈은 ‘덕을 승계하여 공손하게 일을 마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선거에 빗대어 말하자면, 선거에 이겨도 교만하지 않고 표를 구걸할 때의 마음을 끝내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며, 설혹 지더라도 표를 주지 않은 이들에게 눈을 부라리지 않고 공손하게 일을 마쳐야 한다는 뜻이겠습니다. 표를 던지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던진 표가 사표가 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얼굴을 바꾸고 힘 있는 곳으로, 속보(速步)로, 발걸음을 옮겨 앞 다투어 줄을 서는 추태는 부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에서든 ‘후갑삼일’은 미덕인 것 같습니다. 아비의 일을 덕으로 승계하고 유(柔)로 가운데 처하며 위력에 맡기지 않는 일, 그것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선거로, 권력을 만들어내는 자들의 도리라 하겠습니다. 산풍고! 후갑삼일!!

<2015. 4. 1.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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