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Mar 31. 2019

나이들어 밭일을 해야 하는 까닭

장자 이야기

나이 들어 밭일을 해야 하는 까닭    

 

 『장자(莊子)』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일종의 단편소설 모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식자층들의 주 관심사에 부합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를 담은 짧은 소설들이 특히 흥미를 끕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것도 그런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 자공(子貢)이 남쪽의 초나라에 여행하고 진나라로 돌아오려고 한수(漢水) 남쪽을 지나다가 한 노인이 마침 밭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땅에 굴을 파고 우물에 들어가 항아리로 물을 퍼 나르고 있었다. 밭에 물주는 일이 쓰는 애에 비해서는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자공이 말했다. “여기에 기계가 있으면 하루에 백 이랑도 물을 줄 수가 있습니다. 조금만 수고해도 효과가 큽니다. 당신은 그렇게 해보실 생각이 없습니까?” 밭일을 하던 노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말했다. “어떻게 하는 거요?” 자공이 말했다. “나무에 구멍을 뚫어 기계를 만드는 것이지요. 뒤는 무겁고 앞은 가볍습니다. 아주 쉽게 물을 퍼내는데 그 빠르기가 엄청납니다. 그 기계 이름을 두레박이라 부르지요.” 밭일을 하던 노인이 순간 얼굴을 붉히더니 곧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는 내 스승에게 들었소만, 기계가 있으면 반드시 기계를 쓸 일이 생기고 그런 일이 생기면 또 반드시 기계에 사로잡히는 마음이 생겨나오. 그런 마음이 가슴 속에 차 있게 되면 순진 결백한 것이 없어지게 되고 그것이 없어지면 정신이나 본성의 작용이 안정되지 않게 되오. 그러면 도가 깃들 수가 없다는구려. 내가 두레박을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라오. 도(道)에 대해 부끄러워 쓰지 않을 뿐이오.” 자공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며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있었다.

얼마 후에 밭일 하던 노인이 물었다. “당신은 무엇 하는 사람이오?” 자공이 답했다. “공구(孔丘)의 제자입니다.” 노인이 말했다. “당신은 그 널리 배워서 성인 흉내를 내며 허튼 수작으로 대중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홀로 거문고를 타면서 슬픈 듯 노래하여 온 천하에 명성을 팔려는 자가 아니겠소! 당신은 바로 당신의 정신의 작용을 잊고 당신의 육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야 도에 가까워질 것이오. 그대의 몸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무슨 천하를 다스릴 겨를이 있겠소. 빨리 가던 길이나 가시오. 내 일을 방해하지 말고...” 자공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창백해지고 정신이 황망하였다. 30리나 가서야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 [『장자』 외편, 「천지(天地)」, 안동림 역주, 『莊子』, 및 조관희 역해 『莊子』 참조]   

  

도의 이치를 간략하게 가르쳐 주는 이야기인데 도가 아직 몸에 붙지 않은 저에게는 문득 ‘기계치(機械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낯선 기계만 보면 주눅이 드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도 한 때는 소문난 기계치였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형광등 하나 갈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이건 아니잖아?”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래서 작정을 했습니다. 도전 정신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보이는 것마다 무조건 손을 대 보기로 했습니다. 일단 설명서를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읽어내려 갔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설명서 문맹’을 벗어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이후로 일사불란, 집안에 처음 들이는 기계는 모두 제 손을 먼저 거쳐나갑니다. 어제도 집사람이 인터넷으로 주문해 들여온 세워놓고 다리는 증기다리미 세트를 제가 조립해 주었습니다. 그 얼마 전에는 가까이 두고 보는 용도로 쓰는 탁상용 작은 TV도 하나 조립해 주었습니다. 또 그 얼마 전에는 덩치 큰 2단 옷걸이 세트도 이마트에서 구입해 아내가 옷방으로 애용하는 공간에 조립해 주었습니다. 교체된 옛날 식탁의 다리도 톱으로 싹둑 잘라내어 거실 탁자로 쓰고요. 이 정도면 기계치 신세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 거라 여깁니다.   

 

인용한 『장자』 「천지(天地)」 편 이야기는 자공이 위포자(位圃者, 밭일 하는 사람)를 보고 잘난 척하다가 개망신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한 방 얻어터지고, 30리나 걸어가서야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깨져도 크게 깨진 형국입니다. 자기 자신도 스스로 도를 추구한다면서 도인(道人)을 보고도 한 눈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게 부끄러웠던 겁니다. 그를 단순한 기계치 정도로 본 것이 정말 부끄러웠던 겁니다. 위포자는 자공을 나무랍니다. 도를 위해 스스로 기계치를 선택한 것이지 기계의 편의성과 유용성을 몰라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외물(外物)의 작용을 최대한 제거하려고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자공이 그 말의 내용(내용이 주는 교훈) 때문에 부끄러웠던 게 아님은 분명합니다. 사실 그런 말은(그런 내용은) 세간의 속인(俗人)들이나 들을 말이지 이름깨나 나 있던 공자의 수제자가 들을 말은 아니었던 겁니다. 공부깨나 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상식에 속할 말이었습니다. 심지어 저 같은 ‘도 문맹’들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누구나 할 수 없는 경지로 높이는 게 진정한 배움의 자세다”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요. 자공이 부끄러웠던 것은 요즘 항간에서 떠도는 것처럼 일종의 ‘격(格)’과 관련된 문제였을 겁니다. 도인이 도인을 한 눈에 못 알아봤으니 자신의 격이 많이 떨어진 것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자기가 ‘도 문맹’이 아니었느냐는 자비감 때문에 정신을 못차린 것입니다. 이야기의 맥락이 그렇습니다. 실제로 자공이 그랬다는 건 물론 아니겠고요. 소설 속의 캐릭터가 그렇다는 겁니다.     


이 우화는 그 끝을 자공과 공자의 대화로 맺습니다. 자공이 자신이 당했던 일을 노나라에 돌아가서 공자에게 이실직고 합니다. 공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 위포자가 혼돈씨(混沌氏)의 술법을 빌어서 수양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해 줍니다. 노장(老莊)류의 학풍을 지닌 이라는 거였겠지요. 그러면서 위포자가 그런 방식으로 자공을 대한 태도를 평가합니다. ①그 사람은 혼돈씨의 술법을 잘못 배우고 있는 것이다. 하나를 알고 둘을 모르는 거지. 자기의 내면을 잘 다스리고는 있지만 외면을 다스리지는 못해. 자네를 놀래키는 걸 보면 그는 아직 하수야. … 어쨌든 우리가 혼돈씨의 술법을 어찌 이해하겠느냐(안동림 역주). ②그 사람은 혼돈씨의 술법을 빌어 수양하고 있는 사람으로 절대적인 도(道) 하나만 알 뿐 상대적인 것들은 모른다. 그 속만 다스릴 뿐 그 밖은 다스리지 않는다. 너는 놀랄 필요가 없다. … 우리가 어찌 혼돈씨의 술법을 알 수 있겠느냐(조관희 역해).

     

공자의 평가가 위포자를 무시하는 것이든 존중하는 것이든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평가든 장자가(장자의 후학들이) 강조하는 ‘혼돈씨의 술법’이 폄하되지는 않습니다. 외물(外物)에 영향 받지 않는 자기 자신의 확립이 중요한 것이라는 취지에는 그 어떤 해석이라도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살아 보니 위포자의 말이 꼭 과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굳이 수양(修養)까지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불편이 따르더라도 기계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는 게 여러 모로 유익할 것 같습니다. 혼자서 걷는 시간도 좀 늘리고, 음악 청취나 공연 관람과도 같은 순수 객체 놀이에도 좀 더 시간을 투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위포자의 ‘밭일’에 해당되는 저대로의 일거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에도 좀 더 신경을 써야 하겠습니다.  

   

사족 한 마디. 어제 몇몇 동네 후배들과 담소를 가질 일이 있었습니다. 못 본 사이에 ‘밭일’에서 완전히 손 뗀 행색들을 많이들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제 나이들도 제법 먹은 처지들이었는데 두어 사람은 도통 역지사지가 안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친구들에게 부지불식간에 위포자처럼 굴고 있는 저 자신을 문득 발견했습니다. 어떤 때는 직설적으로 타박을 해대는 몰골이었습니다.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기분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사는지 잘 모를 일이었습니다. 입만 벌리면 모두 제 잇속 타령뿐이었습니다. 한 친구는 상태가 좀 심각했습니다. 앞으로 그런 동네 후배들과는 아예 상종을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제 경험상으로 볼 때, 4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에 걸치는 약 10여년간이 작심하고 ‘밭일’을 제대로 해내야 되는 때였던 것 같았습니다. 그 시절을 그저 속악(俗惡)과 겉멋에 빠져 살면 남은 인생이 오로지 고독으로만 점철될 것이라는 것을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날이 어두우면 들어가 쉬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