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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03. 2019

천하에 보여지는 자

주역, 풍지관

천하에 보여지는 자    

 

요즘 한 번씩 유튜브를 찾습니다. ‘불후의 명곡’도 보고 ‘고수를 찾아서’도 봅니다. 젊은 사람이 부르는 흘러간 옛노래들이 듣기가 좋았습니다. 방문을 꼭 닫고 볼륨을 크게 해서 듣습니다. 최근에는 젊은 택견 무예자가 강호의 고수들을 찾아다니는 무자수행(武者修行)을 몇 편 봤습니다. 신체 부상까지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기량을 높이기 위해서 만난을 무릅쓰는 젊은 무자의 불같은 의지와 열정, 그리고 그가 만나서 배우는 무림 고수들의 절정 무예들이 보기에 좋았습니다. 

저도 아마츄어이긴 하나 수십 년간 무도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타고나기를 ‘복부(腹部)형 인간’으로 태어나서인지 큰 성취는 보지 못하였습니다(두뇌형, 근육형도 있답니다). 몸이 굼뜨고 팔 다리가 약해서 늘 부상을 달고 삽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들은 “배로 생각한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희노애락의 감정도 모두 배에 담겨 있다고 여긴다고 합니다. 저도 요즘 그들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종종 듭니다. 그날그날의 복부 상태에 늘 유의합니다. 모든 것이 ‘배의 컨디션’에 좌우됩니다. 배가 가벼우면 그날 운동이 잘 풀립니다. 몸도 쑥쑥 잘 들어가고 탄력감 있게 칼도 나갑니다. 그쪽이 불편하면 그런 게 애초에 안 됩니다. 몸에 힘이 들어가서 칼도 무뎌지고 심리적으로도 안정감을 잃어서 부상(負傷)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당연히 교검지애(交劍知愛, 칼을 나누며 사랑을 안다)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좌우명이 있습니다. ‘보기 좋은 검도를 하자’를 매일 같이 되뇌고 있습니다. 스스로에게도 다짐하고 도반(道伴)들에게도 강조합니다. 승부에만 집착하다 보면 완력도 나오고 막칼도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보기 흉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기 흉하면 몸과 마음을 다칩니다. 늘 듣는 바대로 ‘일안(一眼), 이족(二足), 삼담(三膽), 사력(四力)’을 명확하게 지키고(무턱대고 힘으로 마구 밀어붙이려고 하지 말고), 행여 기세가 눌리더라도 ‘경구의혹(驚懼疑惑)’에 빠져서 허둥대지 말자고(맞고 때리는 데 연연하지 말고 평정심을 유지하기에 힘쓰자고) 틈만 나면 말합니다. 목표물을 내 시야(視野) 안에 두고 언제든지 선제(先制)로 그것을 타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기려는 마음가짐과 자세를 ‘다듬는 노력’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제가 해 보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을 ‘오래, 재미있게’ 하는 첩경인 것 같았습니다.

가장 선결 과제인 ‘보기’와 관련해서는 관(觀)의 보기와 견(見)의 보기를 자주 이야기합니다. ‘관견’에 대해서는 여러 가르침이 있습니다. 숲을 보는 것과 나무를 보는 것의 차이라고 설명하는 이도 있고, 심리적, 기세적 차원에서 마음으로(心眼) 상대를 보는 것과 육안(肉眼)으로 상대의 동작을 세밀하게 체크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이도 있습니다. 상대의 움직임을 통시적(아는 상대면 그의 검풍, 모르는 이면 그의 태(態)), 맥락적(단체전인지 개인전인지 등, 대결 상황 고려)으로 파악하는 것은 ‘관’, 상대의 한 동작 한 동작을 미시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견’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스스로를 환경의 일부로 두고 전체적으로 통찰하는 것을 관(물아일체), 상대의 동작 하나하나를 객관적 살피는 것을 견(격물치지)으로 보고 싶습니다. 

모든 무도(무예)는 상대를 제압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상대를 제압하려면 우선 내 기량이 상대보다 뛰어나야 하겠지만 상대와 내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대결의 환경’에 대한 이해도 필수적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살펴서 내게 유리한 입지를 찾는 것이 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상대에게 내 무력을 행사할 때는 상대의 허를 정확하게 찾아내야 하는데 그것을 찾는 노력이 견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과 견이 상호텍스트적으로 원활하게(거의 무의식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내 칼에 반영될 때 ‘보기 좋은 검도’가 될 확률이 훨씬 높아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주역 스무 번째 괘인 ‘풍지관(風地觀)’, 관괘(觀卦)를 보며 그동안의 제 생각을 다시 한 번 다듬는 계기를 만납니다. 주역에서는 ‘보이는 것을 보라’고 강조합니다. 상대만 볼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는 노력, 상대에게 자기가 어떻게 보여지는 지를 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구오는 나의 움직임을 보되 군자면 허물이 없으리라.(九五觀我生君子无咎) 

상구는 그 움직임이 보여지되 군자면 허물이 없으리라.(上九觀其生君子无咎)

-- ‘관아생’은 스스로 자신의 도를 보는 것이요, ‘관기생’은 백성에 보여지는 것이다.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가장 위의 끝에 처하여 고상한 뜻을 가지니 천하에 보여지는 자이다. 천하에 보여지는 곳에 처하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군자의 덕이 드러나야 허물이 없다. 생(生)은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175쪽]    

 

‘관아생’, ‘관기생’, 그 두 개의 ‘관’을 통해 스스로 허물없기를 노력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쉼 없이 움직여 나가야 생(生)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또 한 번 느낍니다. 주역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이 곧 천하에 보여지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도(道)의 본질을 벗어나 승부나 완력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이 무도 수련입니다. 맞으면 갚아주고 싶고, 여럿이 모이면 남들보다 앞자리에 앉고 싶고, 앞자리를 차지하면 가르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게 무도의 본질일 것입니다. 앞으로 좀더 ‘보여지는 자’로서의 마음가짐에 투철해지자고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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