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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02. 2019

물,불,공기,흙,인간

제5원소

공기흙과 인간5원소 

    

영화 『제5원소(The Fifth Element)』는 1997년 개봉된 프랑스제 영화입니다. 뤽 베송이 감독하고 부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SF활극입니다. 극중의 ‘완전한 인간’, 릴루(밀라 요보비치)를 ‘제5원소’로 설정한 것이, <1+4=5=1>이라는 융심리학에서 설명하는 숫자 상징에 내재한다는 일종의 원형적(原型的)인 공식(상상력)에 잘 부합합니다. 아마 그런 숫자 상상력이 인간의 집단무의식에 깊이 내장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물론, 그런 도식에 에로티즘이라는 촉매제가 필수적이라는, 예능 교과서적인 상식도 잘 지켜지고 있는 영화입니다. 마지막 제5원소가 사실은 에로티즘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설정입니다. 어쨌든 지루하지 않게 본 영화라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제5원소(The Fifth Element)』에서도 부루스 윌리스는 어딘가 좀 불량스런, 한군데 빠진, 부족하지만 능력 있는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그 불량기, 그 불완전의 완전성은 어쩌면 그의 영화들이 표방하려는 “불완전하지만 그들 인간만이 자기들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인간주의 신념에 효과적인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그가 나오는 『다이하드』류의 영화들은, 그 선배격인 007 시리즈가 그렇듯이, 전형적인 피카레스크(악한)식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그런 측면에서 부루스 윌리스는 숀 코네리의 이복 동생, 혹은 ‘아버지보다는 삼촌을 빼닮은 조카’쯤 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부적격자로 낙인찍힌, 악한(惡漢)이나 악동(惡童)이 세상을 크게 해치는 극악한 적들을 물리치는 이야기들입니다. 주인공(성격과 신분)은 고정되어 있고 적당히 시간과 장소가 바뀌면서 활극적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에는 의당 폭력과 에로티즘이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그런 악한 소설류의 스토리텔링을 가미한 영화 『제5원소(The Fifth Element)』는 ‘물, 불, 공기, 흙’이라는 서구의 4원소 이야기를 원용해 그럴 듯한 인간 구원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오락영화치고는 내용도 있는 수작(秀作)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물, 불, 공기, 흙’, 그리고 ‘인간(진수 1에 해당하는 존재)’의 이른바 서양의 오원소 이야기와 중국의 오행설(五行說)은 비슷하면서도 좀 다른 것 같습니다. 5라는 숫자가 지닌 상징성을 중시했다는 것은 같은데, 그것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은 사뭇 달랐던 것 같습니다. 중국의 오행설만큼 오원소설은 위세를 떨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과 믿음을 통한 ‘인간 구원’이라는 종교적 서사(모티프)가 다른 생각들을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하게 위에서 누른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뿐인 절대자, 절대적 경지인 구원이나 해탈, 그런 힘 있는 하나가 다른 생각들을 억압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오원소 이야기가 영화의 소재로 재미있게 활용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역설적인 상황을 전제로 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중국의 오행설은 좀 다릅니다. 자의적인 논리와 상상이 끝없이 날개를 폅니다. 김근 교수의 『한자는 중국을 어떻게 지배했는가』를 보면 오행설의 그런 자의성과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자세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 일반적으로 오행설(五行說)이라 불리는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은 간단히 말해서 고대 중국인들이 우주의 조직과 변천 원리를 이해한 형이상학적 사상 체계이다. <중략> 즉 양계초가 그의 논문 「음양오행설의 내력(陰陽五行說之來歷)」에서 결론으로 지적한 바와 같이 단편적이고도 원시적인 형태의 오행이란 말이 전부터 존재했는데, 이것이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의미의 전이가 일어나 그 내용이 새로이 조직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추연(騶衍)이 그전에 이미 있었던 원시적 <오행>-추측건대, 이것은 고대인들이 인간의 생활에 필수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기본적인 물질을 분류하여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을 <오덕종시(五德終始>라고 하는 순환 논리로 체계화하여 왕조 변천의 해석에 적용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시 말하면 같은 언어 기호에 의미의 전이를 일으켜서 전혀 새로운 지시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추연의 오덕종시설은 과학이 아니고 이데올로기이다. <중략>

(‘오행’이 사실은 텅빈 기표라는 설명에 뒤이어서) 다른 하나는 거짓 인과론으로써 왕조의 변천 역사를 정돈하여 설명하여 합리성을 확보한 것이다. 즉, 가까운 것은 같아진다는 환유 법칙에 따라서 왕조의 변천 역사 중에서 어느 한 부분만이라도 인과 법칙에 부합하면 나머지 왕조들도 모두 이 논리로 줄줄이 엮어져서 순환론이 전체적으로 합리성을 갖게 된다. 이때의 인과 법칙은 일부의 객관성을 전경화(前景化)함으로써 조작된 것이므로 실제로는 객관성을 빙자한 거짓 인과론이 된다. 예를 들어 <나무는 흙을 이기고, 쇠붙이는 나무를 이기며, 불은 쇠붙이를 이기고, 물은 불을 이기며, 흙은 물을 이긴다(木勝土, 金勝木, 火勝金, 水勝火, 土勝水)>고 하는 순환론은 자연 현상을 기초로 하고 있지만, 이것은 자연 현상의 일부가 선택적으로 전경으로 배치된 결과이지 객관적으로 일반화된 원리는 아니다. 그러므로 오행설은 자연 현상을 자의적으로 구성한 거짓 인과론에 의하여 논설의 합리성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중략>

천지가 갈라진 이래로 오덕이 순환하는데, 각 덕에 합당한 바를 다스리면 하늘과 인간의 감응이 이러이러함을 열거하고 서술하였다. …… 그래서 『주운(主運)』이라는 책을 지었다. [『사기』 「추연전」]

이제 그가 저술한 책 중에 『오덕종시』가 있는데, 오덕은 각기 (우세하여) 이기는 바를 그 <행(行)>으로 삼는다. 진나라는 주나라가 화덕(火德)이었다고 하면서, 불을 끄는 것은 물이므로 스스로를 수덕(水德)이라 일컬었다. [『사기집해』 「봉선서」에 인용된 여순(如淳)의 주]

추연의 책에 『종시오덕』이 있는데, 이는 (앞의 행이) 이기지 못하는 바를 계승하는 것이다. 토덕(土德)의 뒤는 목덕(木德)이 이를 계승하고, 금덕(金德)이 그 다음을 계승하며, 화덕(火德)이 그 다음을 계승하고, 수덕(水德)이 또 그 다음을 계승한다. [『문선』 「위도부」의 주에 인용된 『칠략(七略)』의 문장] [김근, 『한자는 중국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188~199쪽에서 발췌 인용]     


사실 옛날부터 오행설에 대한 공부를 좀 하고 싶었는데 그 기회가 없었습니다. 마침, 영화 『제5원소(The Fifth Element)』가 문득 떠올라서 그 자취를 쫓다보니 어떻게 ‘오덕종시’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결론은 ‘일부의 사실을 전경화해서 턱없는 객관화를 꾀하는 것’이 오행설이었다는 겁니다. 요즘 자주 느끼는 “현란한 논리는 결국 허무로 떨어진다”는 제 소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어서 마음이 좀 놓입니다. 그런 것들에게 휘둘리지 않게 하는 것이 결국은 인문학의 소용(所用)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어서입니다. 그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번 오행설 공부에 충분히 만족입니다.


사족 한 마디. 어느 조직에서든 <일부의 객관성을 전경화(前景化)하는 조작으로 객관성을 빙자한 거짓 인과론을 살포하는 자>들이 꼭 있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그 ‘거짓 인과론’을 전제(前提)로 삼아서 말도 안 되는 자기 주장을 조직 논리 속에 무차별적으로 이식하려 합니다. 조직에 대한 지배성을 확보하려고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 동원합니다.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안으로는 자신들의 소집단적 이해관계를 항상 먼저 고려합니다. 전제 자체가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명분을 만회하기 위해, 그들은 그것들을 종종 ‘이데올로기’의 차원으로 몰고갑니다. 무엇이든 ‘이데올로기의 차원’이 되면 논리를 뛰어넘는 힘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소귀(小鬼)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이를테면 ‘오덕종시’와 같은 거짓 순환론을, 무차별적으로 이용합니다. 그렇게 소귀(小鬼)들이 나대는 조직은 결국은 자멸(自滅)합니다. 평생을 이런 저런 공조직, 사조직 안에서 살아오면서 숱하게 그런 경우를 목도했습니다. 조직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실존적 삶에서도 마찬가지지 싶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오덕종시’ 같은 현란한 이론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인생에서 찾을 수 있는 작은 경험의 교훈을 중시해야 되지 싶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달리 이론은 없습니다. 그냥 그래야 되지 싶습니다.


사족 두 마디. 5라는 숫자의 상징성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인생 5학년에 접어들면서 ‘제5원소’ 같은 것(릴루?)이 하늘에서 툭하고 떨어질 것으로 여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1+4=5=1’이 저의 50대를, 당연히, 화려하게 수놓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달리 이론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래야 되지 싶었습니다(거의 신념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6학년이 되고 보니 허망하기 짝이 없는 신념이었습니다. ‘제5원소’는커녕 악전고투, 비몽사몽의 질곡 그 자체였습니다(비단 소귀(小鬼)들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과 싸우는 내 안의 것들이 보기에 더 참혹했습니다). 실존이 완전히 해체되는 위기도 있었습니다(심지어 개종도 해 봤습니다). 그나마 한 목숨 건진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지경이었습니다(실제로 사경을 헤맸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게 맞지 싶습니다. 그래야 될 것 같습니다. 매사에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한 목숨 건진 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합니다.

<오래 전 작성.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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