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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03. 2019

어머니의 몸, 글루미선데이

어머니의 몸과 아버지의 말

어머니의 몸글루미선데이   

  

세상은 아버지의 말과 어머니의 몸에 의해 지탱된다. 그 둘은 모든 일에서 원리나 원칙으로 작용한다. 영화 <글루미선데이>(롤프 슈벨, 1999)는 ‘어머니의 몸’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일로나의 일생은 ‘어머니의 몸’을 그려낸다. 그녀는 천사다. 오직 천사만이 진정한 ‘어머니의 몸’을 구현한다. 그리고 또 하나, 그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자는 오직 그녀의 아들뿐이다. 아들만이 오직 ‘어머니의 몸’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의 궁극적인 주인공은 사실 그 이야기를 전하는 자다. <글루미선데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진짜 주인공은 일로나의 아들이다. 그가 전하는 사실이나 사건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는 지금 어머니의 이야기를 전한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이 어머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영화 <글루미선데이>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은 자보 레스토랑의 새 주인, 영화에서는 이름도 얻지 못하고(누구도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없다) 시작과 끝에만 등장하는 중년의 남성, 일로나의 아들이다. 그는 한스가 일로나의 몸을 폭력으로 취한 후(일로나는 자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를 찾아간다) 생긴 아들이다. 아마 그래서 영화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의 이름에서 한스와 관련된 어떤 단서라도 노출이 된다면, 이 영화가 어머니와 짜고 아버지를 죽이는 아들의 이야기라는, 여백의 미로 남겨둔, 마지막 반전의 묘가 결정적으로 훼손될지도 모른다. 또 하나, 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것은, 혹은 드러날 필요가 없는 것은, 그가 이 세상 모든 아들들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자기 집에서, 자보 레스토랑에서, 그곳을 거쳐간 젊은 날의 어머니와 세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원래 집주인은 명찰(패찰)을 달지 않는 법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힐 필요도 이유도 없다.    

 

이 영화에서 일로나가 일체의 윤리 관념을 뛰어넘어 육화된 천사의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은 이 이야기를 전하는 자가 그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들-연인’으로서, ‘아버지의 말’이 애초에 부재하는 우로보로스적 공간(우로보로스는 자기 고리를 물고 있는 뱀의 형상을 뜻하는 말이다. 융심리학에서는 모태 무의식 상황을 상징하는 그림(말)으로 사용된다. 영화에서도 가운데가 움푹 꺼진 자보 레스토랑의 내부 공간이 그런 우로보로스의 이미지를 지닌다)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는, 아버지들이 정한 윤리나 법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의 세상에는 오로지 ‘어머니의 몸’만이 존재한다. 어머니의 몸은 세상의 모든 갈등과 균열을 하나로 통합하는 공간이다. 사랑의 블랙홀이다. 그러므로 유복자로 태어난 그가 누구의 아들이냐는 질문은 맥락적으로는 우문(愚問)에 속한다. 그에게는 오직 ‘어머니의 몸’, 거대한 하나의 에로스, 그 천상의 에로티즘만이 이 세상의 존재 이유이고, 또 이 타락한 세상을 구하는 유일무이한 원리고 원칙이다. 그 천상의 에로티즘을 가로막는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제거되어야 한다. 독점과 지배의 남성적 폭력은(한스로 대변되는) 지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야 한다. 천상은 영원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하든 악하든 모든 아버지들은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들이다. 자보, 안드라스, 한스, 돈과 예술과 권력(지배)을 표방하는 세상의 아버지들은 모두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다.     

윤리를 초월하거나 무시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에로티즘, 예술, 폭력(전쟁)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영화 <글루미선데이>는 그런 것들을 배경으로 윤리라는 것(특히 성윤리)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한 여자의 불행, 그리고 비극적인 세 남자의 죽음을 통해, 윤리보다 중한 것이 인간에 대한 사랑,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사회적 고정 관념으로서의 ‘윤리적 인간’이라는 것이 포착하지 못하는 삶의 진면목을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영화 <글루미선데이>를 보고 기분이 별로였다고 말하는 남자들도 꽤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한 번 되돌아봐야 한다. <써머스비>와 같이 ‘아버지의 말’이 강조되는 영화가 있다면 <글루미선데이> 같은 ‘어머니의 몸’이 강조되는 영화도 있어야 한다. 누가 뭐래도 세상은 아버지의 말과 어머니의 몸으로 굴러간다. 그 둘은 수레의 양쪽 바퀴다. 어느 하나만 있어서는 온전한 운행(運行)이 어렵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어느 한 쪽이 힘을 얻는 수는 있어도 하나가 완전히 소거된 인간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늘 그 두 가지 원리와 원칙을 존중해야 한다. 분열과 상쟁(相爭)의 시대라면 ‘어머니의 몸’을 더, 그리고 혼돈과 안일(安逸)의 시대라면 ‘아버지의 말’을 더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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