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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04. 2019

고양이 키우기

자기 풍자

고양이 키우기    

 

고양이 좋아하는 사람과 고양이 싫어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유미주의자와 실용주의자의 차이쯤 될까요? 고양이를 싫어하는(사실은 동물 키우는 것을 싫어하는) 아내와 평생 살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한 번 해 보기도 했습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고양이 입으로(고양이 입을 빌려) 무슨 말이든 (고양이와 인간에 관해) 한 번 적어보고 싶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그런 스타일은 모든 소설가들이 한 번은 ‘만지고 싶은’ 것들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역부족으로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고양이를 키우며 일 없이 ‘투사(projection, 받아들일 수 없는 충동이나 생각을 외부 세계로 옮겨놓는 정신 과정)’를 일삼는 한 불안한 심리상태를 그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고양이 키우기>라는 중편소설이 그것입니다.


황정은 작가의 「묘씨생(猫氏生)」은 정공법적으로, 고양이 화자를 이야기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것만 해도 반갑고 대견스러운데 표현 하나하나가 진짜 고양이답습니다. “시력도 거의 사라졌다. 바닥에 바짝 닿은 턱을 통해 흙냄새를 맡는다.”라고 고양이의 심정과 행동을 묘사하는 대목은 마치 저의 마지막 순간을 거기서 만난 듯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제 시력도 소진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감각인 내 후각이 이 지상에서 흡입할 냄새는 과연 무엇일까? 그런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소설 속 고양이는 얼굴을 땅바닥에 누이고 흙냄새를 맡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간신히 생각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어가는 생각’이 아마 이 소설의 내용일 것 같습니다. 

소설은 그렇게 재미있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본디 이런 역관찰자(逆觀察者) 혹은 의인화(擬人化) 주인공 시점은 ‘함축된 저자’를 본격적으로 풍자해야 제대로 재미진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법입니다. 고양이를 통해서 ‘나’를 고발하게 하는 것이지요. 아마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가 그런 소설이지 싶습니다.* 물론, 적당량의 ‘고양이 세태 묘사’를 그 디테일의 깊이가 인정되도록 면밀히 행하고, 그 가운데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삶의 통찰’을 몇 마디 던지는 것이 필수적이겠지요. 그래야 ‘고양이 소설’이 되니까요. 그러나 승부는 역시 ‘자아비판’의 진정성에서 나는 것이지요. 어디까지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있는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런 ‘자기부정’ 없이, 여기저기 고양이가 옮겨 다니는 곳을 따라다니며 카메라 시점으로 일관하면 이도저도 아닌 소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황정은 작가의 「猫氏生」은 그런 면에서 저 같은 ‘늙은 말’들이 보기에는 아직 작품 이전의 상태에 놓여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서두의 한 줄, “바닥에 바짝 닿은 턱을 통해 흙냄새를 맡는다”와 중반의 다음과 같은 묘사 장면은 이 작가의 앞날이 무척 밝다는 느낌을 주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 어떤 전망이나 경치라는 것은 바로 그 자리에서만 발생하는 고유한 것이고 보니 단념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 몸에게도 그런 자리가 있었다. 쥐라거나 남은 밥이라거나 뭐든 먹고 배가 부르면 편안한 자리에서 발을 핥고 곡씨 노인의 방으로 갔다. 어린 몸이었던 시절이 지나간 뒤로 노인은 나를 특별히 보살피지 않았다. 애완동물과 사육자라는 관계는 이미 아니었다. 다만 칠이 벗겨진 문고리를 향해 묘오묘오 부르면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그 방의 궤짝과 선반을 순서대로 밟아서 창으로 올라갔다. 창이라고 부르기도 묘한 것이 본래는 창이 없던 방에 통풍구를 내려고 천장 가까운 곳에 투박하게 뚫어둔 사각 틈에 불과했다. 곡씨 노인은 겨울이라서 바깥이 몹시 추울 때를 제외하고는 그 구멍을 열린 채로 놓아두었다. 창 바깥은 낭떠러지처럼 지상을 향해 깊이 떨어지는 외벽이었다. 높고 좁은 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인간들이 어디론가 이동하며 만들어내는 불빛 띠들을 바라보았다. <중략> 바깥에서도 그런 경치쯤 볼 수 있는 탁 트인 곳이 얼마든지 있었으나 그 자리가 좋았다. 해 지고 난 뒤엔 그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는 날이 많았다. 이따금 노인이 몸을 뒤집는 기척에 눈을 떠보면 그 조그만 방이 마치 천년은 묵은 것처럼 어둡고 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꼬리로 벽을 쓸어보고는 하다가 잠들었다. [황정은, 「猫氏生」, 2011년 이상문학상 수상집, 275쪽]    

 

‘전망(展望)’은 멀리 내다보이는 경치를 뜻합니다. 특정 전망이 특별한 감정을 불러내는 것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매 한 가지일 것입니다. 먹고 사는 일도 중하지만, 좋은 느낌을 주는 특별한 ‘전망’들을 남부럽지 않게 소유하는 것도 꽤나 소중한 일일 것입니다. 인용문에서처럼 고양이가 다른 ‘탁 트인 곳’보다도 ‘지상을 향해 깊이 덜어지는 외벽’을 바깥으로 둔 ‘통풍구’를 유난히 더 사랑했던 까닭은 그것이 바로 ‘곡씨 노인’의 방에 난 창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인은 첫 생애에서 죽음의 문턱에 놓여있던 고양이를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따듯한 체온을 옮겨준 당사자였습니다. 그 삶의 온기를 배경으로 고양이는 각박한 인간 세상을 내려다봅니다. 그러니, ‘전망’이란 것이 꼭 ‘멀리 내다보이는 경치’인 것만도 아니겠습니다. 누구와 함께, 어디에서, 언제 보느냐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내게 ‘전망’이 몇 개나 있는지가 급 궁금해집니다. 거기에 관해서도 다로 한 편의 글을 써야겠습니다. ‘전망에 관하여’쯤 되겠습니다만... 어쨌든, 높은 곳에 앉아서 꼬리로 내 방 벽을 쓸어보다가 잠들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 키우고 싶습니다.  

   

*나쓰메 소세키     

일본의 셰익스피어라 불릴 정도로 확고한 문학적 위치에 있는 일본의 국민작가다. 1867년 일본 도쿄 출생이며 본명은 긴노스케[金之助]로, 도쿄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제1고등학교 시절에 가인(歌人)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를 알게 되어 문학적, 인간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도쿄고등사범학교, 제5고등학교 등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1896년 제5고등학교 교수 시절 나카네 교코와 결혼 했으나 원만하지 못한 결혼 생활을 보냈고, 1900년 일본 문부성 제1회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영국에서 유학했다. 

타지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예민하고 우울한 자아를 남겼으며, 이는 귀국 후에도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치유의 한 방편으로 『고양이전』을 썼고, 이 작품은 1905년 『호토토기스(두견)』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1906)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어 큰 호평을 받았다. 1907년에 교직을 사임하였으며 아사히[朝日]신문사에 입사하여 『우미인초(虞美人草)』를 연재하고 『도련님』(1906), 『풀베개[草枕]』(1906) 등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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