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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05. 2019

십년 쓰임이 없으면

주역, 산뢰이

십년 쓰임이 없으면   

  

‘십년물용’(十年勿用), 십년 동안 물건이나 인물의 쓰임이 없었다면 이미 그 존재의 의의, 용처(用處)가 사라진 것이 아닐까요? 문득, 주역 스물일곱 번째 ‘산뢰이’(山雷頤), 이괘(頤卦)를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뜬금없이 그냥 든 생각입니다. 경문(經文)이나 효사(爻辭)의 취지와는 별개로 든 생각입니다. 텍스트의 내용보다는 읽는 사람에게 절박한 문제를 더 중시하는 투사적 독서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주역에서는 ‘쓰이는 것’들의 문제가 아니라 ‘도(道)의 운용’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육삼은 기름의 바름을 거스리니 흉해서 십 년이라도 쓰이지 못하니라. 이로울 바가 없느니라(六三 拂頤貞凶 十年勿用 无攸利). -- 부정한 데에서 위를 봉양하니 위에 아첨하여 드리는 자이다. 바름을 기르는 의의에 어그러지므로 ‘불이정흉(拂頤貞凶)’이라 하였다. 기르는 데에서 이러한 행동을 하니 십 년을 버려지는 자이다. 이같이 행동하면 배풀어서 이로움이 없다.     

「상전」에서 말하기를, ‘십년물용(十年勿用)’은 도가 크게 패함이라. (象曰 十年勿用 道大悖也)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219쪽]     


‘십년물용(十年勿用)’은 어쨌거나 ‘도가 크게 어그러짐’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도의 운용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십년 동안 쓰임이 없다’라는 자구적 의미만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천장지구(天長地久)’가 ‘하늘과 땅은 장구하다’가 아니라 ‘사랑의 정한(情恨)’을 대변하는 말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십 년 동안 쓰임을 당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 가지 경우를 상정합니다.     


첫째는 연이어 선거에 나가서 떨어지는 경우입니다. 보통 선출직 임기가 4년이니 두 번 떨어지면 10년쯤 쓰임을 당하지 못한 경우가 됩니다. 세 번째는 선거에 나가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10년이면 의리로 뭉쳤던 사람들도 이리저리 다 흩어질 시간입니다. “도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겠다”라며 ‘가르치고, 오기로 하는 정치’는 어쩔 수 없이 도(道)와 크게 멀어집니다.      

둘째는 책을 써서 독자를 구하는데 실패하는 경우입니다. 10년쯤 해서 성과를 보지 못하면 작가 노릇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도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겠다”라며 어렵고 지루하고 읽기 불편한 책을 연이어 출간하는 것은 우매한 일입니다. 온오프 라인 어느 곳에서도 그런 글쓰기를 10년 이상 하면 안 됩니다.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배움을 청하는 이들이 없는데 선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제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생 대접에 소홀하다고 짜증을 내거나 장소 막론하고 훈계를 일삼으면 어쩔 수 없이 도(道)와 크게 멀어집니다.      

마지막으로 부부관계입니다. 10년쯤 서로에게 ‘각별한 쓰임’이 없는 경우라면 서로 원망을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철수하는 것이 ‘도(道)’에 가까워지는 일입니다. 졸혼을 하거나 이혼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같이 살면서 앙앙불락(怏怏不樂, 마음에 차지 않아 불쾌해함)하는 것은 서로의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아직 미진한 부분이 있는 바라 자세한 언급을 삼가겠습니다.     

물론, 위의 세 가지 경우에 대한 말씀이 불문곡직하고 ‘철수해라’를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십년물용’의 상태가 오기 전에 ‘도(道)’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기울이자는 차원에서 한 번 생각해 본 것입니다. 당연히 제가 최근에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철수’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물러나 앉는가? 그것이 저의 절박한 화두입니다. 산뢰이! 십년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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