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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05. 2019

가면 놀음

검도와 펜싱

가면 놀음  

   

동물들도 상대의 얼굴에 많이 집착한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동물들도 그러하다고 하니 인간 세상의 ‘미인 숭배’를 나무랄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미인(美人)에 대한 각별한 대접은 시대마다 나라마다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중국의 경국지색(傾國之色) 이야기는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것이고요, 그리스 신화 쪽의 아프로디테의 황금사과 이야기도 너무나 유명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명예와 부와 권력보다도 미모가 제일 가치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노력해서도 안 되는 ‘천부의 조건’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요즘은 인공으로도 가능합니다만).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는 말도 있긴 했지만(아마 궁벽진 시골 동네 수준에서는 그런 역설도 좀 통했던 경우가 있었을 겁니다) “예쁘면(잘 생기면) 모든 게 용서된다”는 게 인간세의 변치 않는 불문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자연산이든 아니든 이쁘기만 하면 좋다는 요사이 젊은이들의 넓은 아량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저 혼자의 생각입니다만, 인간이 자기나 다른 인간의 얼굴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은 미적 추구 이외에도 또 다른 까닭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얼굴에 마음이 담겨 있다”라고 여기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이 사람이 나에게 무해(無害)한 존재인가를 얼굴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의식적 차원보다는 무의식적 차원에서 더 그럴 것 같습니다. 얼굴이 고우면 마음도 고울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뇌(머리 부분)가 마음의 소재지이고 그것의 출입구가 결국 이목구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얼굴을 보면 그의 마음가짐을 짐작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건 아니라고요? 네, 아니면 말구요.   

  

검도나 펜싱이나 다 얼굴을 가리는 보호장구가 있는 운동입니다. 펜싱 경기를 보다 보면 한 번의 승부가 날 때마다 선수들이 그 보호장구, 가면을 벗어던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거의 매번 그렇습니다. 맨 얼굴로 승리의 환희를 표현합니다. 평생 검도를 하고 있는 저의 입장에서는 그런 장면이 낯설고 신기했습니다. 아직 승부가 다 난 것도 아닌데 중간중간에 그렇게 ‘맨얼굴’을 드러내고 환호작약을 하는 일희일비의 ‘스타일’이 생경했습니다. 검도의 얼굴 보호구인 호면(護面)은 그렇게 쉽게 쓰고 벗을 수가 있게 되어있지 않습니다. 한 번 쓰면 마스크맨의 마스크처럼 끝날 때까지 내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제2의 얼굴이라고나 할까요? 땀과 열기로 밀착되어 진짜 피부와 같은 느낌을 줍니다. 실제로 호면에 익숙해지면 그것을 쓸 때 제 얼굴이 완성되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초보 때는 마치 철가면처럼 얼굴을 옥죄면서 호흡까지 곤란하게 해서 고통을 주던 것이 나중에는 마치 남 모르는 내 은신처처럼 사람을 편안하게 합니다. 여름에 쓰면 시원하고 겨울에 쓰면 따뜻합니다. 당연 마음까지 푸근해집니다. 몇 년 꾸준히 쓰다 보면 쓰는 순간부터 도파민이 팍팍 분출됩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가면(假面)’이나 ‘탈’은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내고 싶을 때 많이 사용하는 오래된 인류의 ‘지혜의 소산’입니다. 각 나라, 각 민족, 각 지역마다 볼만한 탈춤, 가면극 하나 정도는 대물림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검도의 호면도 그런 ‘가면극’에서의 ‘가면’ 역할을 할 때가 있습니다. 본디 다른 소용(얼굴 보호)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새로운 인격의 발견(인간탐구)’이라는 용도로도 많이 쓰이게 됩니다. 얼굴이 완전히 가려진 것도 아니고 그대로 노출되는 것도 아닌, 묘한 앙상블을 이루며 제3의 얼굴이 드러납니다. 당연히, 검도 수련 중의 ‘호면 쓴 얼굴’은 맨얼굴과는 전혀 다른 인격체입니다. 칼을 들고 대결하는 시뮬레이션이 기본적인 게임의 룰이니 당연히 서로 죽거나 부상당하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해서 싸웁니다. 당연히 온갖 그림자(감춰진 얼굴, 무의식적 자아, shadow)가 다 올라옵니다. 그야말로 ‘두 사람이다(세 사람도 가능합니다)’라는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가면을 쓰지 않았을 때와 가면을 썼을 때의 모습이 전혀 다를 때가 많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점잖고 온화하던 사람이 마치 하이에나처럼 바뀔 때도 있고 그렇게 용감하고 무지막지해 보이던 사람이 한순간에 부드럽고 온화하고 섬세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검도를 통해 만난 사람들은 항상 ‘호면 쓴 얼굴’로 먼저 기억됩니다. 호면을 쓰지 않은 ‘맨얼굴’의 얄팍한 가면(드러난 얼굴, 사회적 자아, persona)보다 그림자가 올라온 두터운 맨얼굴이 더 오래 기억됩니다. 사회적 얼굴이라는 가면을 벗기는데 또 하나의 가면이 필요합니다. 역설입니다. 

   

자기부정(自己否定)의 미학, “스스로를 죽이는 자가 결국 다시 살게 된다”라는 역설의 미학이 그 가면 놀음을 통해서 조금씩 몸으로 전달되어 오는 것이 바로 교검지애(交劍知愛 : 칼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알게 된다)가 아닌가도 싶습니다. 참고로 검도에서 가장 높이 치는 기술은 얼굴을 베는 것입니다. 아마 가장 멀리 있는 목표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기에 또 저만의 의미 부여를 해 봅니다. 우리말로는 ‘머리’, 일본말로는 ‘멘(面)’인, 그 얼굴 베기의 구호(기합)는 상대의 퍼소나를 떨어뜨리겠다는 선언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칼로 당신의 낡고 헐거운 얼굴을 떨어뜨릴 테니, 당신은 가면을 벗으시오(내 덕분에!), 그래서 거듭나시오(축복합니다!). 멘(얼굴), 코데(손목), 도(허리), 츠끼(찌름) 등과 같은 기합(타격 부위) 중에서도 단연 ‘멘(面!’이 검도를 대변하는 기합(氣合)이 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겁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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