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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04. 2019

사람에게 이로운 것을

묵공, 안성기와 유덕화

사람에게 이로운 것을    

 

묵수(墨守)라는 말은 본디 묵적지수(墨翟之守)의 준말이다. 묵자(墨子)가 성을 굳게 지켰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인데 자기의 주장이나 의견을 고수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뜻으로 전용되어 많이 쓰인다. 전통이나 관습을 지나치게 존중하여 낡은 틀에 얽매여 새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결국 좋은 뜻은 아니고,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고집불통 상태나 공연한 것에 집착하여 쓸데없는 것을 고수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묵자(묵가)가 성을 지키는 것처럼 난공불락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 이리저리 구르다가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런 부정적인 ‘언어의 역사성’을 얻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좋았던 것이 ‘미끄러져서’ 저급한 것으로 바뀐 것 같아서 좀 씁쓸한 느낌이다. 앞에서 살펴본 ‘천장지구(天長地久)’와는 정반대의 사례라 할 것이다.


묵자와 공수반(公輸盤)의 고사는 유명하다. 사기, 전국책, 묵자 등의 기록이 모두 그 사실을 전하고 있다. ‘묵수’라는 말이 탄생한 것은 묵자가 공수반과 운제(雲梯)라는 성(城) 공격 무기를 두고 한 판 벌인 시뮬레이션 게임에서였다. 묵자가 9전 9승, 완승을 거둔다. 명분이야 있든 없든, 무기를 새로 발명했으니 그것을 꼭 써먹어야겠다는 공수반 측(초나라)과 그런 무의미한 살상을 끝까지(목숨을 버려서라도) 막아내야겠다는 묵자 측(송나라)이 벌이는 가상의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 그 이야기 속에 묵가의 겸애설이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그 고사가 사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우화로, 사랑과 공존의 이치를 밝히고자 했던 제자백가 중의 일파였던 묵가 사상의 유세(遊說)로 읽힌다. 

그런데 내게는 그 묵수라는 말이 좀 다르게 들린다. 아무래도 병(病)인 듯하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다른 생각이 든다. ‘묵수’란 말이 “힘들여 연습한 자는 반드시 보상을 얻는다”로 들린다. 이상하지만,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비슷한 케이스로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도 있다. 물건을 보면 욕심을 낸다는 나쁜 뜻인데 내게는 반대로 들린다. “사물을 볼 때마다 마음(좋은 생각)이 일어난다”로 읽힌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산다”의 반대말로 읽힌다. 물론 병이다. 왜 그렇게 자꾸 읽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얼마 전에 <묵공(墨攻)>이라는 영화가 나와서 두어 시간, 나의 인내심을 요구한 적이 있다. 힘들게 본 기억만 남아있다. 안성기와 유덕화가 출연하는 <묵공(墨攻)>(장지량, 2006)이라는 영화는 한중일 합작이다. 배우는 한국과 중국에서, 자본은 일본 측에서 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고 보니 스타일이 좀 일본식이다. 지루할 정도로 인간을 탐구한다. 잘난 인간 못난 인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핀다. 아주 끝을 본다. 일종의 환멸의 플롯을 가진 영화다. 어쨌든 줄거리는 ‘묵수’라는 고사성어를 바탕으로 해서 작화(作話)된 것임이 분명하다.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나라 장수 항엄중(안성기)이 양성(梁城)을 공략하지만 혁리(유덕화)라는 묵가 한 사람의 힘을 당하지 못하고 패퇴한다. 기본적인 서사구조는 그렇다. 영화는 그러한 뼈대 위에서 각종의 ‘인간적인 상황’을 제시한다. 인구 4000명이 고작인 양성은 혁리의 등장으로 일 당 백, 요소요소에서의 전술, 전략적 승리를 통해서 10만의 외적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승리의 감격에 못지않은 내부적인 갖가지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승리의 공을 둘러싼 갈등이 모두를 지옥으로 몰고 간다. 인간 심리에 내재한 여러 가지 저급한 본능과 충동들이 어떻게 각축을 벌이는지 영화는 상세하게 묘사한다. 혁리의 성공이 자신의 입지를 위태롭게 한다고 여긴 성주 양공(梁公)은 사소한 이간질에도 자멸의 자중지란을 선도한다. 그 과정에서 애꿎은 백성들의 죽음들이 자초되고, 필요 없는 비극들이 남발된다. 안팎의 위기, 영화는 그 두 가지 중심 서사를, 나 같은 이도 지루하게 느낄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낸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미래는 오직 때묻지 않은 어린 아이들에게 있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속악(俗惡)에 물든 어른들에게는 내일의 빛이 없다는 것이다. 혁리가 성 안의 어린이들만을 구출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내겐 그 마지막 결론이 또 다르게 읽힌다. 옛날 캄보디아에서 있었던 크메르 루즈의 만행, 킬링 필드가 떠오른다. 나이 든 것들은 더 이상 바꿀 수 없으니 아예 없애 버리자는 공포의 대학살극이 있었다. 영화 <묵공>도 결국 그런 메시지를 내게 던진다. 물론 병이다. 

    

그런데, 그 제목이 왜 ‘묵공(墨攻)’인가, 당연히  ‘묵수’라 해야 할 것을 ‘묵공’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틀림없이 ‘묵수’에 대한 이야기인데 왜 ‘묵공’인가. ‘수(守)’ 대신 사용된 ‘공(攻)’의 의미가 대체 뭐란 말인가? 왜 감독은 그 제목을 택했을까? 그 영화를 보면서 내내 그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그건 모순어법의 수준이 아니라 차라리 언어도단(言語道斷)이었다. ‘묵수’의 뜻이 그렇게 저급한 뜻으로 격하된 것도 억울(심란)한데, 이번에는 아예 그 말 자체를 없애려는 만행이 아닌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고사를 모르고 영화만 본 이들 중 십중팔구는 ‘묵공’이 원어(原語)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건 폭력이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참이 지난 뒤, 근자에 들어서야, 무언가 느낌이 오는 게 있었다. 이런 생각이었다. 지키기만 하는 놈은 바보다. 지키지만 말고 공격도 좀 해라. 그 재능, 그 힘으로 왜 지키려고만 하는가? 아직도 남은 세월이 있는 줄 아느냐? 그래서는 영영 구원은 없다, 대층 그런 내용이었다. 아전인수(我田引水), 이것도 병이겠지만, 틀림없이 감독도 아마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지 싶었다. 혁리처럼 그렇게 지키기만 해서는 빛이 없다. 출구는커녕 환기통도 없다. 당하고만 살아서는 안 된다. 여러 사람이 뜻을 모아 선한 목적을 위해 좀 더 공격적으로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감독이 그걸 강조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문곡직,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이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그것도 아마 병이지 싶은데, 발병의 근원지는 종내 찾지 못하겠다.   

  

세상에는 누구나 인정하는 절대적인 악(惡) 말고도 은근히 악을 조장하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상대성을 띤 악도 많이 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 살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 쪽에 서 있게 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가끔씩 돌이켜보면 모골이 송연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이제는 가급적이면 그런 경우를 당하지(선택하지) 않고 살고 싶다. 일모도원(日暮途遠), 해는 지고 갈 길은 여전히 멀기 때문이다. 이제는 묵공이다. 달콤한 로맨스도, 화려한 무술연기도, 영웅의 빛나는 활약과 감동적인 승리도 없는, 그 지루한 영화를 보고난 후의 소감이 그것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페이스북에 올릴 심심풀이 글이나 쓰고 있는 주제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이제는 묵공이다. 묵공!    

 

사족. 묵자가 공수반과의 한 판 승부에서 승리하여, 송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제나라로 돌아가던 중 송나라 땅에서 비를 만난다. 갑자기 내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한 민가에 들고자 하였으나 집주인에게 야멸차게 거절당한다. 자신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한 생명의 은인을 어리석은 송인(宋人)들이 알아보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모두 가상의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를 ‘묵적지수’ 뒤에 첨가한 의도는 당연히 이상론에 대한 경계의 의도다. 이를테면, 동화나 우화의 한 특징적 패턴인 ‘현실로의 출정식’(이야기는 이야기에 그친다)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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