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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07. 2019

망상과 간청

이콘의 의미

망상(妄想)과 간청(懇請 

    

모든 생각은 한갓 망상(妄想)일 뿐이다. 프로이트는 그렇게 주장합니다. 피해망상, 과대망상, 생각은 인간의 질병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모든 ‘생각’이 오직 증상(症狀)일 뿐입니다. 좀 살아보니 프로이트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안위(安危)에 대한 지나친 집착, 자기와 다른 것들(인간, 기계, 약물 등)에 대한 원천적인 불신(不信)을 보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그들도 마찬가집니다. 생각이 많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종종 외부 현상에 대한 지나친 견강부회를 초래합니다.    

   

한 때 저도 생각께나 했습니다. 어떤 때는 고의적으로 그런 ‘넘치는 삶’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하루 종일 공상 속에서 헤맸습니다. 청년기 때는 소설을 쓰기도 했고요. 왜 그랬는지 그 원인은 알 수가 없습니다. 날 때부터 그런 성정을 타고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것이 제 생활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자의식이 들면서부터 고쳐보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가급적 생각 없이 살려고 노력하는 한 편 운동을 과하게 해서 생각이 제 몸 안에 눌러앉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약간의 차도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도 제 주변에는 ‘생각 많은’ 이들이 많습니다. 직업이 직업이라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아주 적은 이를 볼 때는 덜합니다만(개선의 여지가 있으니까요) 저 정도로 나이 많은 이들 중에서도 여태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을 볼 때면 절로 측은지심이입니다. 개중에는 친분이 깊은 이들도 있어서 가금씩 신에게 그들을 생각의 지옥에서 꺼내달라고 간청을 할 때도 있습니다.     


... 성 루가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마지막 성모 이콘의 유형은 분명치는 않으나, 성모와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간청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데이시스’ 유형의 이콘*에 나타나는 성모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하기아 소피아 사원(지혜의 대성당)의 13세기 모자이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간청entreaty’이라는 의미를 지닌 데이시스 유형의 이콘에서 그리스도는 이미 성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유형은 이콘 파괴 논쟁이 종료된 9세기 말 이후에야 나타나는데, 성모와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가 지닌 신성의 첫 번째 증인이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이콘이 등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궁정 신하들의 간청을 받아들이는 비잔티움 황제의 위엄을 상기시키기 위해 도입된 이미지로도 볼 수 있는 이 데이시스 형상은 교회 내부에서 지성소의 ‘베마’(가장 거룩한 장소)와 신자들의 공간인 회중석 즉 나오스를 분리하는 ‘템플론’(성과 속을 구분함과 동시에 하늘과 땅,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는 상징적 조형물)에 위치하며, 이콘 파괴 논쟁 이후에는 템플론이 발전한 ‘이코노스타시스’에서 중심적인 이미지가 된다. [ 『이콘과 아방가르드』(이덕형, 생각의 나무), 189쪽]    

 

‘간청(懇請)’이라는 말을 보니 10년 전 쯤에 있었던 제 경험이 떠오릅니다. 자칭 무교회주의를 추종하면서 ‘생각’으로 종교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친지의 결혼식에 참여했습니다. 신도시의 어느 깨끗한 성당이었는데(사위가 러시아 총각이었습니다), 위층에서 ‘자비송’이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낮게 깔려서 저의 머리를 쓰다듬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가 저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 간절한 인간의 ‘간청’에 저의 모든 ‘생각’들이 한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아마 거기서 또 한 번 거꾸러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또 한 번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또 생각?).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간청’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온갖 생각, 온갖 집착, 온갖 욕심을 버리고 그저 신에게 간청하는 일, 자비를 비는 일, 그것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습니다.     


문득, 발칙한 생각이 하나 듭니다(허황망상?). 신성을 증거하는 세상의 모든 이적(異蹟)들은 결국 ‘간청’의 빌미를 제공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리라는 생각입니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경험, 자신의 믿음을 한순간에 날려보내는 그런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도 있어야 인간은 신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안고 태어나는 운명 앞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또한 망상이겠죠?    

 

*데이시스(deisis) 형상: 기독교 미술 주제의 하나. 본래는 청원(請願), 기원(祈願)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이다. 전 인류의 사면을 예수에게 청원하는 중재자로서의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은 고개를 수그리고 손을 내미는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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