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Apr 07. 2019

흘러간 의리의 노래, 영웅본색

여자들이 의리에 강하다

흘러간 의리의 노래영웅본색  

   

페이스북 친구 중 한 사람이 『영웅본색(英雄本色)』(오우삼, 1986)의 한 장면을 자신의 담벼락에 올린 걸 봤다. 주윤발과 장국영의 포옹 장면이 캡쳐되어 있었다. 장국영이 죽는 장면인 거 같았는데(그 사진을 올린 분이 장국영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1편에서는 그런 장면을 본 기억이 없다. 아마 2편이나 3편의 한 장면인 것 같다. 동년배였던 장국영이 그렇게 가는 바람에 그 뒤로는 『영웅본색(英雄本色)』을 우정 꺼내서 보는 일이 없어졌다. 주윤발은 그 뒤로 너무 많은 영화에서 만났다. 이제 ‘영웅본색’은 내 기억의 화면에서 많이 퇴색된 채로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그 사진이 다시 내게 『영웅본색(英雄本色)』의 기억을 되살려 놓았다. 그리고 내 젊은 날의 한 때를 크게 위무(慰撫)했던 옛 친구에 대해서 아직 한 마디의 찬사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 죄책감을 불렀다. 그야말로 ‘의리 없는 자의 행색’이 아니냐는 자책이 뒤따랐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쓰는 김에 두어 편 ‘의리 담론’에 대해서 연속적으로 쓸 생각이다. 『적벽대전』이나 『영웅』 같은 영화가 그 대상이 될 것 같다. 이를테면 ‘의리 삼부작’ 정도가 될 것 같다.      


언젠가 다른 지면에서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영웅본색(英雄本色)』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의리 없는 놈은 인간이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의 그것과 같다. 그래서 『영웅본색(英雄本色)』은 『삼국지(三國志)』의 홍콩 느와르적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의 의리담론이 현대적으로 각색되는 데 아직은 『영웅본색(英雄本色)』만한 스토리텔링이 없었던 것 같다. 여태 『영웅본색(英雄本色)』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보통 ‘의리(義理)’가 강조되는 소설이나 영화의 맥락에서는 악역(惡役)을 빼놓을 수가 없다. 절대악이라 할 만한 존재가 나와야 한다. 『삼국지(三國志)』에서 조조가 극악한 성정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는 것도 그 까닭이다. 그래야 의리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의리담론은 필연적으로 선악 대결을 자신의 이야기 뼈대(플롯)로 삼을 수밖에 없다. 오직 그 대립 관계만이 의리라는 비세속적인 개념을 전경화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선명하게 의리를 내세우기 위해서는 절대악이라는 반(反) 의리가 필수적이고 악역을 맡은 이가 그 어려운 작업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그는 ‘반(反)의리=악’이라는 도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악전고투(惡戰苦鬪)해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나쁜 짓이라는 나쁜 짓은 다 저질러야 한다. 사실 의리극(義理劇)의 재미는 그가 만드는 악행의 난도(難度)나 순도(純度)에 의해 결판난다. 소설이든 영화든 의리극의 재미는 오직 그의 공(功)이다. 『영웅본색(英雄本色)』에서는, 아호(송자호, 적룡)와 소마(마전충, 주윤발)의 뒤를 이어 조직을 관리하는 신세대 보스(의리보다 효율성을 강조하는) 아성(이자성, 이자웅)이 그 역할을 맡는다. 그는 관객들의 분노를 사며 끝까지 악행을 저지르다가 결국 고소하고 시원하게(?) 죽는다. 어려운 일도 도맡아서 다 처리하고(그는 사실 막후의 보스 ‘아저씨’의 그림자다) 막판에는 스스로 비참하게 추락한다. 사실은 그가 주인공이다. 의리 없는 놈은 죽어 마땅하다는 공감대는 그 없이는 아예 생각도 할 수 없다.     


『영웅본색(英雄本色)』에서는, 아성(극중 명 이자성. 영화 『신세계』에서 이정재의 극명이 이자성이다.)이 불운(不運)의 선배 소마(小馬, 주윤발)를 빌딩 옥상으로 데려가, 명멸하는 네온사인 아래서, 피 터지게, 린치를 가하는 장면이 최고의 장면이다. 가히 압권이다. 폭력 조직의 비정함이 화면 가득 넘쳐흐르면서, 어쩔 수 없이 파국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텍스트의 결말을 암시한다. 소마의 얼굴에서 묻어나온 피를 자신의 흰 목도리로 닦아내면서, “네가 진정한 영웅이면 이 수모를 견디지 말고 저 아래로 떨어져 보라”는 아성의 조롱은 가히 일당백이다. 도대체 너희들이(구닥다리 선배들이) 왜 영웅이란 말이냐? 내가 너희들보다 못한 게 무어냐? 오직 마지막 승자만이 영웅이다. 아성은 그렇게 외친다. 몇 번을 봐도 『영웅본색(英雄本色)』의 백미 중 백미다. 어제까지 뺨을 토닥이며 일을 가르치고 돈을 주고 가여워해 주던 후배였는데, 오늘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야비하게 선배를 두들겨 패는 조직의 보스가 되어 있다. 자기를 키운 선배를(보스 자리까지 양보한) 욕을 하고 개 패듯이 팬다. 옛날에 나를(몰라보고!) 조롱한 앙갚음이다. 의리도 인정도 사라진 강호에는 오직 약육강식의 동물적인 이해관계만 존재한다. 아성은 돈을 끌어 모으고 그것으로 조직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런 절대악의 횡행을 보면서 피가 거꾸로 솟구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도 역시 ‘의리를 모르는 놈’이다(능력있는 후배들한테 곧잘 능멸당하는 못난 선배들은 모조리 동병상련한다). 그렇게 구박받던 소마가 아호(송자호, 적룡)의 복귀를 간청하는 장면도 명장면이다. “3년을 기다렸다 친구야, 너라면 할 수 있잖니, 나와 함께 저 홍콩의 야경을 접수하자, 그냥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맞아서 얼굴이 온통 퉁퉁 부어오른 소마는 친구에게 그렇게 애걸복걸한다. 그러나, 아호는 요지부동(경찰인 동생도 생각해야 하고, 무엇보다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더 큰 의리를 생각한다), 동생 아걸(송자걸, 장국영)이 아성의 음모로 위험에 처할 때까지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제 시간은 흐르고(극이 끝날 때가 다가온다), 악은 악의 수법으로 징벌하는 게 원칙이므로 송자호와 소마는 아성을 궁지로 몰고 경찰인 아걸의 협력을 얻어 그를 처단한다.    

 

공연히 흘러간 옛노래, 아니 옛 필름을 다시 돌리는 까닭이 무엇일까? 아마 요즘 세상이 온통 ‘본색(本色)’들 천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누구나 다 오래 살다보면 그런 꼴을 당하겠지만 나도 한 때 아성 같은 본색(本色)을 만나 고생께나 한 처지라 ‘의리담론’에는 꽤나 민감한 축에 속한다. 목불인견(目不忍見), 어디선가 또 그 ‘의리를 모르는 놈들’을 본 모양이다. 그래서 손이 근질근질해서 못 견뎠던 모양이다. 

요즘 어떤 정치인을 두고 정치판에서 ‘의리 없는 놈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이, 예의 그 삼국지적 ‘의리담론’이, 슬쩍 한 번 회자되는 것 같다. 자신을 천거하고 선거를 도와서 당선에 기여했던 사람을 정치적 이해에 따라서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공격하는(물어뜯는?) 행태를 두고 나온 말인 것 같다. 그를 두고 누군가가 “사람은 의리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말했고 그게 신문에 난 적이 있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오래 전에도 그런 말이 떠돌았던 적이 있다.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그 정권의 수하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형국인데, 누구는 변치 않고 몰락한 보스를 위해 신명을 다 바친다고 신문들이 은근 슬쩍 그게 무슨 미덕이나 되는 양 공치사를 늘어놓았던 적이 있었다. 민초들도 그들이 깡패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의 ‘의리’를 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정치판이 본디 무림 강호(江湖)이니 의리를 둘러싼 설왕설래가 없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만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의리는 항상 두 갈래 길 위에서만 존재한다. 시험받지 않는 의리는 진정한 의리가 아니다. 의리를 모르는 자들은 절대로 의리 속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는다. 시험대 위에 오르려고 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든 실리(實利)와 편의(便宜)를 취해야겠다고, 그렇게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의 도리라고 믿는 자들은 자신이 시험대에 올려지기 전에 그 자리를 떠난다. 그게 그들의 손자병법이다. 보스가 바뀔 때면 모두 ‘아성’ 밑으로 들어간다. 절름발이가 된 옛날의 ‘소마 형님’은 안중에 없다. 그래야 된다. 그게 그들의 사는 법이고 의리다. 

그래서 일단 그런 자들의 세계에서 ‘의리’가 설왕설래(說往說來)되면 이미 상황은 종료된 뒤라고 봐야 한다. 본색들에게 의리를 요구하는 것은 결국 지금 너에게 줄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 그들을 탓할 수도, 탓해서도 안 된다. 그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게 영원한 그들의 본색이다. 고작 홍콩의 야경이나 탐내면서, 자기를 거두어준 몰락한 선배를 짓밟는 아성을 탓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이미 그런 ‘말(의리 없는 놈은 인간이 아니다)’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그래서 그렇게, 소설이나 영화, 환상밖에는 다른 위로가 없다고, 이미 천 년 전에 『삼국지』가 그렇게 적고 있으니 말이다.   

       

사족 하나. ‘의리’가 본디 남자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말해지고 있으나, 내 평생의 경험에 따르면 여자들이 오히려 ‘의리’에 더 충실한 편이다. 기분 맞는 사람과의 관계가 꽤 오래 간다. 인간 관계에 세간적 욕심이 덜 침투하는 것 같다. 남자들은 그렇지 않다. 관계 맺기에 잇속이 많이 작용한다. 좀 추하다. 속설에, 칼을 잘 쓰고, 모이면 연신 ‘형님’을 연발(연호)한다는 게 조폭과 여자들의 공통점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의리’를 강조(묵수)하는 것도 그들의 공통점으로 하나 더 첨가해야 할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원래 동아시아의 민초들이 추구했던 ‘의리’는 대의(大義)가 아니라 소절(小節)이다. 그런 이들 중에는 세간적 이해에 초연한 백수들이 많았다. 중국의 형가나 섭정 같은 자객들이나 일본의 47인의 사무라이(쥬신구라)들 역시 모두 백수였다. 그들은 조국이나 민족, 혹은 거룩한 이념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던진 것이 아니라,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앞뒤 안 가리고 불 속에 뛰어든 자들이었다. 이를테면 모두 소절의 화신들이었다. 『영웅본색(英雄本色)』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가족적 범주 안에서 행동의 근거를 찾는다. 그게 의리다. 그러니, 여자들이 더 의리에 강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여자로 태어나면 일단 의리에서 남자들보다는 유리한 입지를 차지한다. 하도 의리 없는 놈들을 많이 보다 보니 그런 염이 든다.   

작가의 이전글 망상과 간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