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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07. 2019

그 장딴지에 느끼면 흉하니

주역, 택산함

그 장딴지에 느끼면 흉하니 

    

한 자리에 오래 서 있다가 보면 갑자기 다리에 마비가 와서 난감한 경우를 겪을 때가 있습니다. 나이 들어서 두어 번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어제도 수업 중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간신히 주변 사물에 의지해서 무릎을 찍는 일은 겨우 면했습니다. 아마 제가 무리하게 힘을 주어 ‘서 있는 자세’를 취하는 습벽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녁에 운동을 하면서 장딴지와 허벅지 쪽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지금은 허벅지 쪽이 단단하게 뭉쳐있는 느낌이 듭니다.


마침 오늘 주역 읽기가 어제의 흉한 경험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라 신통한 느낌이 듭니다. 사지(四肢)에도 귀천이 있다? 주역 서른 번째 괘인 ‘택산함’(澤山咸), 함괘(咸卦)를 읽다가 문득  어제 일이 떠오르고 이런저런 생각이 듭니다. 경문의 취지는 “산 위에 못이 있는 것이 함(咸)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서 자기를 비워서(혹은 허심(虛心)이나 겸허하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기운감응(氣運感應)’해서, 더불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본뜻에는 무심하고 '사지귀천'에만 몰입이 됩니다. 어제의 그 ‘흉함’ 때문이라 여깁니다. 함괘(咸卦) 풀이에서는 감응의 천박한 수준을 엄지발가락(拇), 장딴지, 다리(股), 등(脢), 볼과 뺨과 혀, 등으로 그 단계를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구든 혹시 자신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천하화평(天下和平)’에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혹시 자기 위주의 편벽된 망상이 아닌지, 그 감응의 수준을 한 번 살펴보라는 교훈인 것 같습니다만 제겐 그런 ‘큰 말씀’보다는 사지의 형편을 비유의 글감으로 차용한 주역의 용사(用事)가 더 신선해 보입니다. 그 상징의 신선함이 탄복을 자아냅니다.     


주된 교훈을 무시하고 생뚱맞게 ‘사지귀천(四肢貴賤)’을 생각하는 것은 어제의 ‘흉함’에도 기인하기도 하지만, 주역이 지목하는 신체 부위(감응의 수준을 비유하는)들이 검도를 수련할 때 흔히 생기는 부상(負傷) 부위와 엇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손목이나 팔에 엘보가 오고, 장딴지가 터지고, 무릎 관절이 아프고, 허리에 통증이 오고, 어깨의 회전근개가 파열되는 것이 검도 수련을 열심히 할 때, 혹은 무리하게 할 때, 생길 수 있는 부상입니다. 공교롭게도 주역이 대체로 그에 준해서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역을 지었다는 문왕(文王)도 몸 공부를 하면서 그런 병통을 뼈저리게 겪었기에 그렇게 작문(作文)한 것이 아닐까라는 근거 없는 추리(망상)까지 해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문왕도 그 이름과는 달리 틀림없는 검술의 고수였을 거라고 단정해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런 잡념과는 별개로 함괘(咸卦)에서 말하는 감응의 수준은 여러모로 ‘사람 사귐’에 있어서의 뼈아픈 반성을 촉구합니다. 주위에 사람 없는 것이 다 제 탓일 뿐입니다.   

  

초육은 그 엄지발가락에 느낌이라.

육이는 그 장딴지에 느끼면 흉하니 가만히 있으면 길하리라.

구삼은 그 다리에 느낌이라, 사람을 쫓아다니는 뜻을 가지니, 가면 궁색하리라.

구사는 바르면 길에서 후회가 없어지니, 이리저리 오고가서야 벗이 네 생각을 좇으리라.

구오는 그 등에 느낌이니 후회가(후회는) 없으리라.

상육은 그 볼과 뺨과 혀로 느낌이라.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247~251쪽]     


주역에서 말하는 각 신체 부위는 기본적으로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오는 공간적인 거리 감각에 따라 나열된 것들입니다. 그 높이에 따라서 경중이 매겨집니다. 내 의식의 중심과의 거리, 그리고 (그것에 따른) ‘부적합성’의 위계가 설정됩니다. 그것을 보면서 또 엉뚱한 생각 하나를 끄집어내 봅니다. 검술에 있어서의 사지의 역할을 고려했다면 다른 설명도 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냥 재미로 해 보는 생각입니다. 이를테면, 구오의 효사는 “매(脢)는 심장의 위, 입의 아래이다. 나아가서 크게 감응할 수 없고 물러나도 역시 뜻이 없을 수 없으니, 그 뜻이 천박하므로 후회가 없을 뿐이다”라는 식의 설명도 가능했을 겁니다. 엄지발가락에서 출발해서 혀로 이르는 감응이, 만약 그것들이 심장을 통하지 않는 것들이라면, 진정한 군자의 ‘함’(자기를 비워 함께 함)이 아니라는 뜻을 좀 더 명확하게 밝히는 말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까지 주역을 읽어오면서 새로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주역은 누구를 위해서 지어졌는가?”와 “주역에서 말하는 군자는 과연 사람인가?”가 그것입니다. “점술서인가, 수신서인가?”라는 의문은 이제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그 둘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점술서로 봐도 좋고 수신서로 봐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별로 필요 없는 점괘가 많습니다. 수신서로 봐도 그렇습니다. 주역은 아무래도 극히 소수의 사람을 위해서 지어진 저술인 것 같습니다. 일반 대중들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상황이 많습니다. ‘군자’라는 말을 보면 그렇습니다. 과연 그 말의 내포가 사람의 것인가라는 의문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 말이 참 허황됩니다. 저도 크게 욕먹고 사는 입장은 아닌데 도무지 족탈불급입니다. 그래서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군자'라는 말은 그저 ‘오고가는’ 말일 뿐입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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