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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06. 2019

세 상자의 주제

3이라는 숫자의 의미

세 상자의 주제 

    

프로이트의 글 중에 ․「세 상자의 주제」(1913)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두 작품 『베니스의 상인』과 『리어왕』을 다룹니다. ‘3이라는 숫자의 상징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해설이 재미있습니다. 프로이트가 눈여겨 본 것은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세 상자였습니다. 여주인공(포샤)이 구혼자들에게 자신의 초상화가 들어있는 것을 찾으라고 요구하는, 금․ 은․ 납으로 된 세 상자였습니다. 아시다시피 답은 납 상자입니다. 포샤는 가장 가치 없어 보이는 납 상자 안에 상속녀인 자신의 초상화를 넣어두었습니다. 그것을 알아맞히는 총각에게 결혼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진실’을 통찰하는 현명한 총각만이 아름답고 당당한(공주거나 부잣집 딸인) 신부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설화적 진리입니다. 겉으로 볼 때 가장 가치 없어 보이는 외피(外皮)를 무시하고 그 안에 빛나는 보물이 들어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는 ‘승리자’입니다. ‘승리자’가 보물(미녀)을 차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우울증에 빠진 공주를 치유하고(웃겨서) 부마가 되거나, 괴물에게 잡혀간 부잣집 딸을 구하고 그 집 사위가 되는 이야기는 어디서나 흔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그들은 공주나 부잣집 딸과 결혼해서 승리하는 게 아니라 승리자이기에 그런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원래 모든 이야기들은 그런 스타일(패턴)을 답습합니다. 그냥 “그렇군”, 그냥 “이야기들은 원래 그래” 하고 넘기면 될 일을 프로이트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색다른 이야기,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나 첨가합니다. 본디 이야기들이 즐겨 취하는 스타일을 취하지 않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인간들의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 반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여기에 나타나 있는 주제는 도덕적 해석의 대상일 수 있다. 이것은 희곡에서 납 상자를 선택한 구혼자가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말 자체에서 암암리에 드러난다. 납은 찬란한 겉모습으로 본성을 숨기려 하지 않으며 따라서 소박․ 겸손․ 진솔을 상징하는 금속이기 때문이다. 그 젊은이는 이러한 품성을 존중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눈부시게 아름다운 상속녀와 결혼하도록 지명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진정한 아름다움은 금이나 은으로 미화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가장 보잘것없는 겉모양, 곧 납 상자의 겉모양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해석을 피상적이고 재미없는 것으로 여겨 제쳐놓는다.

프로이트는 또한 천체와 연결 짓는 해석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한 해석은 동일한 주제에 기반을 둔 세 상자 이야기와 몇몇 전설을 겹쳐 본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그 전설들에 따르면 각각의 상자는 어떤 특별한 천체계에 대응한다는 것, 이를테면 금은 태양의 세계에, 은은 달의 세계에, 그리고 납은 별들의 세계에 상응한다. 프로이트는 작업 방식을 거꾸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 해석을 거부한다. 천체와 관련된 주제에 의해 신화를 설명하려고 할 때, 실제로는 이미 인간적 사연의 반영인 어떤 것이 인간의 이야기에 투영된다. 왜냐하면 천체 신화란 인간의 모습이 투영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주제의 인간적 의미, 다시 말하자면 한 남자가 세 여자 중에서 한 여자를 고르는 선택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꿈속에서 상자․ 보석함․ 바구니 따위는 대개의 경우 여자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세 여자 중에서 한 여자를 선택해야 하는 이 상황은 세 여신 중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여신을 고르도록 요청받은 파리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의 미남 영웅.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우스의 부인 헬레네를 납치한다) 신화를 비롯한 여러 신화에서, 또한 세 자매 중에서 가장 볼품없고 가장 천대받던 처녀를 왕자가 선택한다는 신데렐라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희곡 『리어왕』에서도 매우 흡사한 상황이 발견된다. 이 희곡에서는 아내가 될 여자를 고르는 구혼자가 아니라 세 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늙은 왕은 세 딸이 그에게 보여줄 사랑의 정도에 따라 재산을 분배하기로 결심한다(그래서 세 딸 가운데 두 명이 상속을 받게 된다). 두 언니가 요란스럽게 사랑의 맹세를 늘어놓는 반면에, 사실 가장 사랑이 깊은 막내딸 코델리아는 계속 말이 없고 언니들처럼 야단스런 사랑의 표시를 내보이지 않는다. 겉모습에 속은 리어 왕은 두 언니에게 왕국을 나누어준다. 그 결과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이의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막스 밀네르(이규현), 『프로이트와 문학의 이해』, 문학과지성사]     


프로이트는 ‘3이라는 숫자의 상징성’을 ‘죽음’에서 찾습니다. 세 번째 상자인 ‘납’은 ‘창백하고 말 없음’의 표상으로 죽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죽음 안에 가장 고귀한 것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리어 왕의 셋째 딸 코델리아도 마찬가집니다. 그녀는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조촐한 모습을 보이고 가장 겸손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상징인 ‘3’, 즉 셋째 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아름답고, 상냥하고, 바람직한 여성’들이 하필 ‘죽음’과의 친연성을 가지는 것, 그래서 ‘죽음’이 미화되는 까닭을 프로이트는, ‘반동형성’으로 설명합니다. ‘욕망이 낳는 반대의 것에 의한 어떤 것의 대체에서 생겨나는 효과’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앎은 ‘현실의 저항’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 죽음을 표상하는 여자를 가장 아름답고 가장 바람직한 여자로 만든다는 겁니다. 기발하긴 했지만, 상당히 궁색한 설명이었습니다. ‘포샤’와 ‘코델리아’는 ‘절대적인 아버지의 딸’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처지이긴 했으나 사실은 아주 상반된 인물(캐릭터)들이었습니다.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포샤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코델리아를 한데 묶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 둘을 하나로 묶느라 이것저것 견강부회가 많았습니다. ‘반동형성’도 그렇습니다. 기왕에 ‘거부할 수 없는 무의식적 충동’을 끌어올 요량이었으면 차라리 ‘죽음의 충동’이 훨씬 더 설득적일 수도 있었습니다. ‘죽음의 충동’을 프로이트가 만약 이 시기에 발견했었더라면(개발했더라면) ‘반동 형성’ 같은 어설픈 설명으로 ‘사랑을 나타내는 여성과 죽음을 나타내는 여성이 하나의 심상으로 동일화되는 문제’를 굳이 장황하게 늘어놓을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았습니다. 그는 인문학자로서 ‘죽음’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적 반응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3’에서 그것을 찾았습니다. 그 작업에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원된 것이 ‘포샤’와 ‘코델리아’였습니다. 프로이트는 가공된 이야기들로 또 하나의 가공된 이야기를 만든 것입니다. 이를테면 통조림 같은 ‘가공된 식료품’을 사용한 ‘편의적인 한 끼 식사’를 만들어놓고는 그것이 ‘식재료의 풍미를 그대로 살린 일품 요리’인 것처럼 내놓았던 것입니다. 발상도 재미있고, 설명도 그럴 듯하지만 아무래도 너무 ‘가공된’ 스토리텔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그런 식이라면, 인간의 이야기 본능 자체가 죽음에 대한 저항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흔히 ‘예술적 틀’로 차용되는 이야기 속의 모든 ‘죽음’들은 일종의 ‘반동 형성’에 대한 또 하나의 ‘반동 형성’입니다. 대체로 주인공의 죽음은 작품의 결말을 알려주는 기호가 됩니다. 그 많은 작품 속의 ‘주인공의 죽음’은 무엇으로 설명될지 궁금합니다.     


그러니까, 프로이트 자신이 행한 대로, 그의 정신분석적 해석 역시 도덕적 해석, 천체와 연결 짓는 해석 등과 함께 그 누군가의 ‘해석’에 의해 거세될 운명에 놓인 것입니다. 저는 ‘3’이라는 숫자가 ‘다(多)’의 다른 이름이라는 견해에 동조합니다. 그리고, 결과는 늘 의외의 것으로 다가온다는 인생의 진리를 ‘3’이라는 숫자가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이외의 화소(話素)들은 어쩔 수 없이 ‘첨가되고 혼합되어, 복잡하고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에 불과하다는 해석을 지지합니다. 어쩌면 ‘3’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첨가되고 혼합된’ 이야기 요소일지도 모릅니다. ‘3’이라는 숫자는 결국 반전에 또 한 번의 반전을 가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네가 예상한 대로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게 바로 인생이다.”, 포샤든 코델리아든 모두 그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기용된 ‘연기력 좋은’ 배우들이었다는 겁니다. 저는 그런 해석이 좋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 앞에도 가끔씩 ‘세 상자의 선택’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나의 포샤’가 나타나 그녀의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내게 금 · 은 · 납으로 만든 세 개의 상자 중에 자신의 초상화가 들어 있는 상자를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선택한 기억이 없습니다. 어쩌면 제대로 된 상자 자체가 없었던 같기도 합니다. 그럴듯한 ‘세 상자’가 내게 오기를, 내심 그런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삽니다. 그럴 때면, 내일 당장 죽더라도, 할 수만 있으면 ‘금’을 택할 것이라고 굳게 마음먹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생 뭐 별 것 있겠습니까? 금으로 된 상자를 안고, 그것이 주는 행복이 하루든 일 년이든, 멋지게 한 번 꼭대기에 앉아보는 것이 내 소원이라고, 그렇게 다짐합니다. 부평초 같은 한 평생, 산다는 게 결국은 한 번이라도 반짝이는 삶을 살아보는 데 의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보통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야 정상입니다. 인생은 짧고, 할 일은 딱히 없습니다. 실제로 현실에서 ‘금’을 두고 ‘납’을 고른다는 것은 변태일 공산이 큽니다.      


제 경우는 두 가지쯤으로 요약되는 것 같습니다. 일단 ‘세 상자의 선택’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 같고요(늘 한 개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나 눈에 무엇이 덮여 씌어서 ‘세 상자의 선택’인 줄 알고 덤벼들었다가 지뢰밭에 들어간 경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저 정도 살아본 분이라면, 그리고 이 글을 끝까지 읽어 주신 분 정도라면, 그런 느낌이 특별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동병상련 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사는 게 결국은 오십보백보니까요. 그러니, 혼기를 늦추고 있는 미혼의 남녀들은 ‘상자 고르기’에 시간과 정열을 낭비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어차피 내 상자는 언젠가 혼자서(‘세 상자’일 때는 거의 없습니다), 스스로 뚜껑을 연 채로, 나를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냥 눈 딱 감고 그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들어가 보면 그 안에 포샤도 있고 코델리아도 있습니다. 간혹 숲속의 마녀도 있고요. 명심할 게 있습니다. 그들은 절대 상자 밖으로는 나오지 않으니 반드시 상자 안으로 들어가서 만나야 한다는 겁니다. 잊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당장 상자 안으로 들어가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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