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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Feb 19.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패스가 좋아야

패스가 좋아야쌍으로 묶는 글쓰기      

축구 경기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골 결정력이지만, 골 결정력을 뒷받침하는 것은 단단한 조직력, 곧 패스(pass)의 힘이다.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제의 목표를 향해 힘 있게 나아가려면 문장과 문장의 연결이 좋아야 한다. 독자의 마음을 파고드는 날렵하고 정확한 문장들끼리의 ‘패스의 힘’이 없이는 독자의 수비력(불신의 장벽)을 돌파할 수가 없다. 설명은 설득을 목표로 할 때가 많다. 제품 사용 설명서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설명이 설득을 목적으로 한다고 봐야 한다. 이해를 구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근본 이유를 고려한다면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설득은 모든 설명의 최종 목표다. 이해관계없이 순수하게 이해만 구하는 해설이나 순수하게 정보 전달만 목적하는 글쓰기는 거의 없다. 특히 ‘글쓰기 인생’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설득을 목표로 하는 설명이 글쓰기 활동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줌으로써 인정 투쟁으로서의 글쓰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설득은 공감을 전제로 한다. 논리적으로 설복(說服)되더라도 마음속 깊은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설득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글은 설득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 ‘나’를 과장하거나 내 식견의 범위를 넘어선 것을 쓰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무엇보다도 솔직한 태도를 취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고 솔직함만 강조하고 논리성을 홀대해서는 안 된다. 이치에 닿는 문장 만들기는 모든 설명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된다.

이치에 닿는 글쓰기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전제-결론’을 쌍으로 묶어 쓰는 글쓰기를 몸에 익혀야 한다. 그 순서와 분량은 어떻게 되어도 무방하다. ‘전제-결론’도 좋고 ‘결론-전제’도 좋다. 전제와 결론을 구성하는 문장은 하나여도 좋고 여러 개여도 좋다. 전제 하나에 결론 둘, 전제 둘에 결론 하나도 무방하다. ‘전제-결론’을 ‘원인-결과’로 환치해도 괜찮다. ‘질문-대답’도 좋고 ‘설명-부연설명’도 좋고 ‘묘사-설명’도 좋다. 무엇이든 쌍으로 묶어서 글을 쓰면 된다. 글을 쓸 때는 한 문장씩 만들어 가는 게 아니라 항상 두 개 이상의 문장을 쌍으로 묶어서 만들어 간다는 명확한 의지를 가지는 게 중요하다.

‘쌍으로 묶는 글쓰기를 몸에 익힌다’라는 이 단원의 글쓰기를 한 번 되돌아보자. 첫 단락의 다섯 문장은 ‘결론(2)-전제(3)’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 결론과 전제는 각자 ‘설명-부연설명’으로 묶여 있다. 

완성된 한 편의 칼럼을 예로 사용해 ‘쌍으로 묶는 글쓰기’의 방법과 효과를 살펴보자. 


<형제여 오라>     

살다 보면 그동안 알고 있던 사람이나 사물그리고 단어 같은 것이 갑자기 새로운 느낌이나 의미로 다가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작은 세상 하나를 새로 얻게 됩니다. ㉰그런 작지만 확실한’ 만남을 자주 겪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렇습니다.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소소한 행복감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 자가 진정한 현자(賢者)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진리입니다. 이웃나라의 한 유명한 소설가는 그런 것을 ‘소확행(小確幸)’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는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속옷을 볼 때 느끼는 행복과 같이 바쁜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즐거움을 그렇게 불렀습니다.(村上春樹, ‘ランゲルハンス島の午後’). 사전을 찾아보니 이와 유사한 뜻의 단어로 스웨덴의 ‘라곰(lagom)’, 프랑스의 ‘오캄(au calme)’, 덴마크의 ‘휘게(hygge)’ 같은 것들이 있더군요. 그만큼 널리 공유되고 있는 삶의 지혜라는 것이겠지요. 저는 엉뚱하게도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습니다. 이른바 ‘소확행’은 중국 은나라의 시조인 성탕(成湯) 임금이 반명(盤銘, 세숫대야에 새겨놓은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날로 새로워지기를 노력함)의 의미가 현대적으로 구현된 것이라 보고 싶습니다.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거창한 ‘한 소식’에 목을 매고 사는 것보다는 작지만 확실한, 지금 내 곁에 와 있는, ‘새로운 느낌이나 의미’들을 꾸준히 축적하는 것이 곧 내 삶을 날로 새롭게 향상하는 첩경이 되고, 나아가서 내가 속한 공동체의 평안에 크게 기여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이 되면 저절로 준(準) 지상낙원이 되지 않겠나라는 희망적인 생각도 들고요.

제가 겪은 소확행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십여 년 전쯤 ‘형제’라는 단어에 꽂힌 적이 있었습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던 중이었습니다.     

“다시 물고기가 돌기 시작했고 노인은 거의 물고기를 잡을 뻔했다. 그러나 또 물고기는 자세를 바로잡고 유유히 헤엄쳐 나가 버렸다. 

네가 나를 죽이는구나, 물고기야, 노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너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나는 일찍이 너처럼 크고 아름답고 침착하고 위엄이 있는 물고기를 본 적이 없어. 그래서 네가 나를 죽인다고 해도 조금도 서운할 것 같지가 않구나. 형제여, 자, 어서 와서 나를 죽여라, 이제 누가 누구를 죽이건 상관없다.

머릿속이 혼미해지고 있구나, 노인은 생각했다. 머리를 좀 식혀야 해, 끝까지 남자답게 고통을 견디도록 온갖 지혜를 모으거나 저 물고기처럼 고통을 견뎌야 해.”     

형제라는 단어가 누가 누구를 죽이건 상관없다에 연결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말이 크고 아름답고 침착하고 위엄이 있는’ 영혼에 수여하는 작위(爵位벼슬이나 지위)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나중에 조폭영화 신세계를 보고 그 의미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고귀한 영혼의 혈통을 나눈 형제들끼리는 누가 누구를 죽이건 상관없다는 늙은 어부의 말이 오랜동안 제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모르긴 해도 제 세숫대야에 그 말이 담긴 이후로는 제 얼굴에 묻은 잡티 하나쯤은 더 씻겨나갔을 것으로 짐작해 봅니다. 한 평생 살아오면서 숱한 형제들을 만납니다. 대개는 진짜가 아닙니다. 청새치 형제를 가장한 상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 기다림 끝에 망망대해에서 형제를 만난 늙은 어부처럼 인생길 어디서든 형제를 만날 것을 믿습니다. 물론 일신우일신, 스스로 형제 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되겠습니다만.<양선규, 경북일보>


위에 인용된 <형제여 오라>라는 제목의 칼럼은 소확행(小確幸)이라는 세간에서 유행하는 단어에 착안하여 ‘형제’라는 말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글이다. 필자는 ‘형제’를 ‘크고 아름답고 침착하고 위엄이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정의하고 그런 ‘형제’들과 함께 하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독자를 설득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로 헤밍웨이의 명작 『노인과 바다』의 한 대목을 든다. 전체적으로 구성이 단단하고 짧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하고 있는 설명의 글쓰기다. 

밑줄 친 ㉮-㉯-㉰와 ㉱-㉲-㉳가 전형적인 ‘쌍으로 묶는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다. 대전제(㉮)-소전제(㉯)-결론(㉰), 혹은 전제(㉮)-결론(㉯㉰)으로 도입부를 만들고 있다. 신문 칼럼이라는, 상식과 시대 조류를 감안한 설명의 글쓰기이기에 비교적 논란의 소지가 없는 평범한 행복 담론으로 말문을 열고 있다. 그다음 순서로 소확행 이전부터 각 나라에서 애용되던 비슷한 말을 소개한다.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고 자신이 하는 이야기가 소통의 가치가 있는 것임을 인정받고자 한다. 그런 연후에 헤밍웨이의 말을 빌려 ‘형제와 함께 하는 삶’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한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소확행임을 밝힌다. 그 과정에서 ㉱-㉲-㉳의 ‘쌍으로 묶는 글쓰기’가 이루어진다. 전제(㉱)-결론(㉲㉳)의 묶어 쓰기로 글의 마무리 작업을 자연스럽게 시작한다. 이것들은 다시 하나로 묶여서 마지막 단락의 전제가 되고 있다.  

예문에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볼 만한 ‘쌍으로 묶는 글쓰기’는 활발한 연상과 자연스러운 유추의 결과일 때가 많다. 바꾸어 말해서, 연상과 유추에 능하게 되면 ‘쌍으로 묶는 글쓰기’는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진다. 본디 모범이 되는 좋은 글들은 새롭고 재미있는 연상과 유추에 기반해서 작성되는 법이다. 꾸준하게 ‘쌍으로 묶는 글쓰기’를 실행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글에서 그것들의 활약상을 목도하게 된다. 현재에 낙심하지 말고 포기를 모르는 끈기로 일신우일신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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