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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Feb 18.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코드와 맥락, 혹은 오해와 편견

코드와 맥락혹은 오해와 편견


이항 대립, 비교와 대조가 설명의 기둥이라고 했지만 아무것이나 비교와 대조의 건자재로 사용해도 무방하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반드시 공인 기관의 검증을 통과한 제품을 사용해야 한다. 잘못하면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독단과 불만으로 내부가 썩어있는 자재를 사용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균형감각을 최대한 살려서 자신을 끌어당기는 이항 대립의 유혹을 점검해야 한다. 일례로 일본 문화를 ‘축소 지향의 일본인(우리는 그렇지 않은데)’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싶다든지, 한중일의 정원(庭園)을 ‘적당, 과대, 과소’로 비교하고 싶다거나 했을 때 무턱대고 그 유혹에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일본인의 정교화 취향은 특별한 것이 맞다. 제품 하나하나에 들어가는 장인의 정성은 정말 대단하다. 감탄의 대상이다. 그것은 그들의 우월한 민족성이다. 그 과정에서 ‘정교한 작은 제품’들이 눈에 많이 띈다고 해서 그들은 일괄 ‘축소 지향의 일본인’으로 몰고 가는 것은 올바른 설명의 자세가 아니다. 하나를 얻기 위해 만 개를 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럴 때 내가 취한 코드와 맥락이 오해와 편견이 된다. 

한중일의 정원(庭園)을 ‘적당, 과대, 과소’로 비교하고 싶은 마음도 마찬가지다. 중국인은 허풍쟁이고 일본인은 본디 작은 인간(왜놈)이라는 선입견이나 불만이 선입견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따져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정원은 자연의 지형지물을 잘 활용하는데 일본의 정원은 드러내 놓고 인공(人工)을 자처하고 있다는 식의 이항 대립식 대조법은 그야말로 야바위 설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본인이 정원을 만들 때는 항상 주제(主題)를 먼저 고려한다. 자연 그대로를 즐길 것이 아니라면 그런 주제 우선주의가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그것을 지나친 인공의 개입이라고 말한다면 “나와 다른 것은 모두 틀린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항 대립을 설정할 때는 그것이 행여 투사(投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감정이나 욕망을 남에게 돌려버림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는 무의식적인 마음)의 작용이 아닌지 잘 다져 봐야 한다. 다음에 소개하는 책은 우리나라가 ‘공자의 천년 왕국’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신유학의 이기 철학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철저하게 이항 대립으로 설명한다. 앞에서 말한 모든 야바위 이항 대립식 설명의 부작용을 이만큼 잘 보여주는 책도 없을 것 같다. 이 글을 쓴 것은 이 책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무렵 몇 사람이 나누어 읽고 번역을 해서 저자에게 번역본을 내지 않겠느냐고 문의하였는데 6개월 뒤 사양하겠다는 대답이 왔다. 이번에 번역본이 나왔다고 한다. 내용보다는 설명의 방법을 공부하는 자료로 사용하는 데 유용한 텍스트인 것 같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리>의 민중과 <기>의 민중 :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들 변화는 그 전부가 순수하게 「위에서부터」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래로부터」의 힘이 「위로부터」의 힘을 견제하고 부정하고 때때로 분쇄하여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가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힘이라고 한마디로 말해도 그 내용은 천차만별이다. 재야 지식인, 학생, 중산 계층 등, 그 대부분은 <사대부 지향> 혹은 <선비 지향>으로 몸을 무장한 세력이었다. 이 세력과 민중이 일체화되어 권력 즉 역사의 전횡을 막아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체 「민중」이란 무엇인가? <리기>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것에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무언․무욕․천진함․무심․무지의 존재이며, 사회 하층에서 검소하고 청결하게 살아가는 무구(無垢)한 객체이다. 이것은 <기의 민중>이라 부를 수 있다. 무욕이라는 점에서는 그 <기>는 맑지만 무지라는 점에서는 탁하다. 이에 대해 또 하나의 측면은 사회적 모순을 가장 첨예하게 체현한 계급, 그래서 역사의 정당한 전개를 가장 잘 추진할 수 있는 세력, 즉 무구한 주체이며 <리>의 민중이라 할 수 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었을 무렵, 이것은 혁명의 주체라는 역할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리>의 민중과 <기>의 대중 : 그런데 이 민중과 닮았으면서도 다른 것으로 「대중」이 있다. 민중은 주체이든 객체이든 어쨌든 무구한 존재였다. 농민․노동자․도시 영세민 등, 권력에 억압․수탈․ 소외된 선량한 백성이었다. 그것에 반해 대중이란 <욕망=기> 쪽의 존재이며 <기가 탁한 객체>로 인식된다. 민중은 이념에 따라 지배․통제하기 쉽고 대중은 이념에 따라 지배․통제하기 어렵다. 민중은 이념을 믿지만 대중은 이념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정치권력을 추구하는 운동체에게 있어서 민중은 바람직한 존재이고 대중은 멀리해야 할 존재였다. 또 대중은 욕망으로 지배·통제하기 쉽고 민중은 욕망으로 지배·통제하기 어렵다. 대중은 욕망에 살지만 민중은 욕망에 살지 않기 때문에. 그 때문에 경제적 헤게모니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체에게 있어서 대중은 바람직한 존재이며 민중은 멀리해야 할 존재이다. 이처럼 민중과 대중을 둘러싸고 정치 운동체와 경제 활동체 사이에는 날카로운 대립이 전개되고 있다.

민중의 시대에서 대중의 시대로 : 80년대에는 「민중민주주의」 세력이 찬연한 성과를 올려 <리>의 민중은 빛나고도 성스러운 정치적 상징이 되었다. 민중은 한국의 「기층(基層)」「기축(基軸)」이라 불렸으며 「민중사」「민중 사회학」「민중 경제학」「민중문학」이 연구되었다. 독재권력과 폭력적 자본, 종속을 강요하는 외세에 포위된 시대에 민중을 성화(聖化)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민중은 정의의 담당자로서 <리 쪽>이었으며 대중은 욕망의 담당자로서 <기 쪽>이었다. 그러나 80년대 말, 민주화가 일단 달성되면서 민주화의 중심세력이었던 민중은 역사의 표면에서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대중이 등장하게 된다. 민주화란 민주주의라고 하는 <리>의 관철인 동시에 개(個)를 억압하는 <리>의 해체이기도 했다. 보편보다도 개별이 강조되며 권위적 도덕보다 자유와 욕망이 긍정된다. 90년대 한국의 최대 변화는 <욕망=기> 쪽인 대중이 신자본주의의 <리>를 획득하여 사회적 주체로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말의 경제 위기로 인해 대중의 빛도 둔해갔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대체 무엇이 한국사의 주체가 될 것인가? 「시민」인가? 아니다. 역시 「국민」「민족」일 것이다. (오쿠라 키조(小倉紀藏),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중에서)


저자는 민중과 대중의 차별화를 통해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이기 철학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가 보기에는 <기>가 <리>의 일방적 독주를 막아낼 수 있는 사회, <기>와 <리>의 변전(變轉)이 자유로운 사회가 건전(건강)한 사회이고, 우리 사회도 차츰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제의 <기>였던 대중이 오늘의 <리>로 나아갔다는 설명에서 그런 맥락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런 설명의 틀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보다는 일본이 역사적으로 그런 측면을 더 많이 노출해 온 것 같다. 일본의 관점에서 한국을 본다는 뜻이다. 일본에는 중심을 잡는 <리>를 가운데 두고 온갖 잡다한 <기>들이 차별성 없이 공존 공생하는 묘한 ‘포섭적 세게관’이 있다. 천황제의 용인과 그 운용 실태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하다못해 스모판 하나만 보더라도 그런 나름대로의 천하(天下) 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타자(他者)가 등장하면 그런 포섭적인 천하관도 섬나라의 야마토주의로 금방 얼굴을 바꾼다. 가면 속의 얼굴이 드러난다. 역설적으로, 그래도 자기들은 안 그런 줄 아는 것이 일본인의 힘이다. 그게 옆 나라 입장에서는 불쾌하고 불편할 때가 많다. 위의 예문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사람살이를 <리>와 <기>로 일도양단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살이’는 그렇게 한 가지 개념으로 일도양단될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더군다나 우리는 겉옷 하나만 벗으면 임금부터 노비까지 모두 똑같은 바지저고리를 입고 살아온 민족이다. 계급에 따라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옷을 입고 살아온 일본 민족과는 많이 다르다. <리>와 <기>로 나눌 수 있는 집단무의식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우리나라라는 말이다. 백보를 양보한다 해도, 일상의 삶에서 <리>와 <기>가 대립적으로 마주 보며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기설을 부정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일단 형상을 지닌 존재로 있는 것들은 모두 <기>의 발현(이발기발이든 기발이승이든)인데 <리>의 민중과 <기>의 민중으로 이항 대립을 만드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자체로 모순어법이 아닌가라는 말이다. 이발 민중이 있고 기발 민중이 있다는 발상이 혼돈스럽다.

민중과 대중이라는 이항 대립도 ‘어처구니없는’ 대조법이다. 이 두 단어는 각기 다른 범주의 정의를 요구하는 것들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여자와 여사’의 관계를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민중과 대립하는 것은 귀족이니 양반이니 지배층이니 재벌이니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대중과 대립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소수의 엘리트 집단은 모두 대중과 대립한다. 유명 연예인이나 프로 스포츠 선수나 노숙자나 불량배도 대중과 대립한다. 어떻게 민중과 대중을 한 평면 위에서 비교하고 대조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에는 이런 이항 대립 말고도 여러 가지 재미있는 관찰 보고가 많다. 개중에는 귀가 솔깃한 것도 꽤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인상은 결국 아전인수고 견강부회로 귀착된다. 사람살이를 어렵게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개구리와 전갈’이라는 이솝 우화의 이야기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그러한 속성을 풍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강어귀에 도착한 전갈은 강을 가로질러 가길 원했으나 부근의 어디에서도 다리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근처에 앉아 있던 개구리에게 다가가 자신을 등에 태워 강을 건네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 하지만 개구리는 전갈이 독침으로 자신을 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이를 거절했다. 전갈이 말하길, “내가 독침으로 너를 쏜다면 둘이 함께 가라앉아 죽을 것인데, 그건 바보나 하는 일이 아니냐”라고 했다. 개구리는 이 말에 일리가 있어 실어다 주기로 허락했다. 하지만 강을 중간쯤 건넜을 때, 전갈은 개구리를 쏘아 즉사시켰고 이어 자신도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무엇이든 움직이는 것을 쏘고 싶은 본성을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의 예문을 읽다 보면 지식인의 속성과 전갈의 속성이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죽는 길인 줄 뻔히 알면서 자신을 실어 나르는 개구리를 찌른다.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이 독 묻은 전갈의 꼬리가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의 삶의 터전이 되는 앎의 세계에 독침을 찔러 넣는다. 내가 가진 코드와 맥락이 다른 누군가의 오해와 편견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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