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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10. 2019

하루에 세번이나 접견하도다

주역, 화지진

하루에 세 번이나 접견하도다     


적우(赤雨)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청승기가 있는 그녀의 노래 중 ‘하루만’이라는 곡이 마음에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때로 듣는데 즐거움이 있었습니다(주역의 말투를 흉내 내 보았습니다). 가사의 의미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지금은 후렴구인 ‘하루만’이 나오는 대목만 생각납니다. ‘하루만’은 제목이면서 노래 전편의 정서를 함축하고 있는 일종의 바운드 모티프(bound motif)가 되고 있는 후렴구입니다. “하루만이라도 절절한 사랑을 하고 싶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적우라는 가수 특유의 물기 젖은 듯한 호소력 있는 음색과 잘 어울리는 구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나 노래나 한 구절만 심금을 울리면 되지 나머지 것들까지 일일이 다 해석하고 되새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주의를 분산시키다 보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수도 있으니까요. 당연히, 가사 내용 전체로 이런 유의  노래를 즐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체적인 곡조(曲調)가 우선 마음에 들어야 하고 핵심이 되는 몇 마디의 가사가 심금을 울려야 애창곡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관계로 따박따박 노래를 잘 한다고 다 가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사람을 끌어당기는 음색이 있어야 하고 때를 만나 다중의 심금을 울리는 곡조와 가사를 얻을 때 비로소 가수가 됩니다. 그 중에서도 음색이 우선입니다. 타고나는 것이 태어나 얻어지는 것들보다는 항상 우선입니다.    

 

죄송합니다. 노래를 좋아하다 보니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횡설수설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하루만’이라는 노래로 ‘오늘의 주역 읽기’를 시작한 것은 달리 먹은 마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늘 아침 문득 ‘사람의 시간’에 대해서 한 소식 들은 것이 ‘하루만’을 연상케 한 것입니다(이런 걸 두고 자유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잘 모르겠습니다). 페이스북에서 재미있는 천문(天文)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박춘제님 담벼락). “75억년 뒤에는 지구가 자전을 멈추고 50억년 뒤에는 태양이 소멸한다”는 내용입니다. 적우라는 가수는 ‘하루만’을 불러서 제게 하루만에도 느낄 수 있는 모종의 인생의 의미 혹은 묘미를 음미할 수 있는 기회(촉촉한 하루 저녁의 페이소스)를 선물했는데, 페이스북은 또 75억년 뒤의 일이나 50억년 뒤의 일을 제게 가르쳐서 인생의 덧없음을 일깨웁니다. 그와 동시에, “도대체 어디서 ‘사람의 시간’을 찾아야 하나, 하루가 우선인가, 75억년이 우선인가?”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그런 잡념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잡념의 포로가 되는 것도 참 오랜만의 일입니다.     

일단, ‘하루’ 쪽에 서 봅니다. 100년을 채 못 사는 인간이 75억년을 계산하고 50억년 이후를 예측합니다. 인간이 외부의 사물(특히 자기보다 큰 것)을 측정할 때 잘 쓰는 것이 무엇일까요? 자신의 신체 부위를 이용하거나 자신의 키 전체를 사용하는 방법이 옛날부터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시간을 잴 때도 자기 시간을 척도로 삼는 방법 이외에는 마땅한 방법이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어릴 때 하던 자치기에서처럼 우주의 시간을 그렇게 한 땀 한 땀 재다 보면 몇 발자국 못 가서 인간 자신은 소멸합니다. 무한대에 수렴하는 시간 앞에서 우리 인생은 제로에 수렴될 뿐입니다. 수십억 년에 100년짜리 자를 갖다 대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잴 수 없는 것’을 재어 보려고 꿈틀거리다 이내 사라지는 게 인생입니다. 75억년의 시간은 100년의 시간이 잴 수 없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가장 자주 범하는 실수나 실책이 그런 시간 관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도 절대 시간이라는 환상이 빚어낸 하나의 오류일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니 저희 같은 우주의 하루살이들이 ‘하루만’을 열창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현대의 주역인 과학적 발견들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겸허하게, 지구덩어리가 거대한 한 생명체라는 것을 인정하고 ‘부분’으로서의 삶에도 최선을 다해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다시 주역을 펼칩니다. 주역 서른다섯 번째 ‘화지진’(火地晉), 진괘(晉卦)의 경문은 “진(晉)은 훌륭한 제후를(제후들에게) 많은 말(馬)을 하사하고 하루에 세 번이나 접견하도다”입니다. 단전(彖傳)에서는 “진은 나아가는 것이니 밝은 태양이 땅 위에 나와서 유순해서 크게 밝은 데에 걸리고 부드럽게 나아가서 위로 행하느니라”라고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273쪽). 

어쩌면 이럴 수가 있나 싶습니다. ‘화지(火地)’는 결국 ‘태양과 지구’인데 오늘 제가 그들을 만난 것도 다 정해진 운세였던 것입니다(하루하루 따박따박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물론 주역이 지구의 멸망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고 ‘태양과 지구’처럼 군신관계가 ‘딱딱 들어맞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말과 하루 세 번의 접견’은 ‘태양’ 쪽에서 ‘지구’ 쪽으로 보내는 사랑의 표시이고 ‘부드럽게 나아가서 위로 행하는 것’은 ‘지구’ 쪽에서 ‘태양’ 쪽으로 보내는 경의의 표시입니다(좋은 때를 만나면 누구나 ‘하루에 세 번 접견’을 당하는 호사를 경험합니다). 이 진괘(晉卦) 해설의 백미는 마지막 상구(上九) 효사(爻辭, 한 괘의 각 효에 대한 설명)인 것 같습니다.     

상구(上九)는 그 뿔에서 나아가니, 읍을 정벌하면 위태로우나, 길하고 허물이 없거니와, (이를) 바르다고 하면 궁색하니라. (上九 晉其角 維用伐邑 厲吉无咎 貞吝) - 나아감이 극에 이르러 밝음이 적절한 정도를 넘었으니, 밝음이 장차 상하게 된다. 이미 뿔에 있거늘, 오히려 더 나아가니 너무 지나친 것이다. 저 도로 화하고 무위로 하는 일을 잃으면, 반드시 쳐서 정벌한 후에야 읍을 복종시키게 된다. 위태로우나 이에 길함을 얻고, 길해서 허물이 없어지나, 이를 바르다고 하면 또한 천한 것이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278쪽]     


‘밝음’이 정도가 지나치면 상하게 된다는 것, 도가 빛나지 않으면 ‘정벌’까지 해야 된다는 것, ‘정벌’로 얻는 것들을 ‘바르다’라고 하는 것은 천한 것이라는 것 등이 인상적입니다. 제가 그 비슷한 실패담 한 자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위태로우나 이에 길함을 얻고, 길해서 허물이 없어지나’로 이어지는 주역의 화법도 마음에 듭니다. 마치 좋아하는 노래의 후렴구처럼 내용보다 그 화법이 점점 더 심금을 울립니다. 곱씹을수록 진국이 우러나옵니다. 주역이 반복적으로 주입하고 있는 “착하게 살자”에 인이 박혀버린 탓인가요? 요즘 들어서 주역의 음색이 날로 듣기 좋아집니다. ‘하루만’이라도 주역이 가르치는 바대로 살아서 ‘도(道)로 화(化)하고’ 싶습니다. 내 지구의 자전이 멈추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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