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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09. 2019

살찌는 도망

주역, 천산돈

살찌는 도망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도망자>(1993, 앤드루 데이비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시카고의 유명한 의사 리차드 킴블(해리슨 포드)은 어느 날 갑자기 감당하기 힘든 불행에 직면합니다. 응급 수술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내 혼자 있는 집에서 살인극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낯선 침입자가 아내를 살해하고 있었습니다. 범인과 죽을힘을 다해 사투를 벌였지만 그는 범인을 놓치고 맙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이 선량한 시민에게는 정말 감당키 어려운 불행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가 더 어처구니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됩니다. 그는 아내 헬렌의 살인범으로 몰리고, 급기야는 사형을 언도받습니다. 무엇인가 그를 둘러싼 음모의 올가미가 작동한다는 것을 눈치 챈 그는 호송버스가 전복하는 틈을 노려 탈주를 시도합니다. 영화는 그의 탈주 행로와 그를 잡으려는 연방 경찰 제라드(토미 리 존스) 사이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긴박하게 묘사합니다. 의사 킴블은 진짜 범인을 잡아내지 못하면 도망죄까지 추가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입니다. 제약업체와 부도덕한 의료계의 부정한 음모와 한 판 사투를 벌이는 ‘도망자’의 긴박한 도망일지(逃亡日誌)는 시종일관 보는 이에게 숨막히는 스릴을 제공합니다. 전형적인 서스펜스 추리물입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단란했던 한 가정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선량한 한 의사를 흉악범으로 만들고, 국가와 사회를 우롱하면서 오직 자신들의 부정한 이득만을 취하고자 했던 악한 무리들은 결국 목숨을 건 의지의 사나이, 선의의 ‘도망자’에게 잡혀 법의 심판대에 오르게 됩니다. 이런 ‘범인을 잡지 못하면 범인이 되는 기막힌 도망자 이야기’가 서스펜스 추리물의 대표적인 패턴이기도 합니다.   

  

살다 보면, 해리슨 포드의 <도망자> 만큼은 아니지만, 얼추 그 비슷한 신세가 될 때가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있고, 학교에서도 있고, 직장에서도 있습니다. 구경꾼들은 가급적 남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가 않기 때문에 신원(伸寃)은 항상 본인의 몫입니다. 범인으로 몰려 처벌을 받기 전에 진짜 범인을 잡아야 하는데, 하늘이 돕기 전에는 ‘나만 알고 있는’ 정의를 실현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런 행운은 약자에게는 잘 찾아오지 않습니다. 진짜 범인은 항상 세(勢)를 업고 날뛰기 때문에 쉽게 꼬리를 밟히지 않습니다. 설령 꼬리가 밟혀도 이내 그 꼬리를 자르고 달아납니다. 필요하면 적당히 희생양이 되는 ‘꼬리’를 만들어 몸통을 보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힘없는 자들은 늘 당하면서 삽니다. 하릴 없이 <도망자> 같은 영화나 보며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 힘없는 약자들이 주로 하는 일입니다.     

‘36계 줄행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우영 선생의 만화였던가요? 어려서 그 말을 접했습니다. 그런데 작가가 그 말을 소개하면서 ‘도망이 최고다’라는 의미로 읽어달라고 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본 것이라 그 자세한 출전을 기억하기가 어렵습니다만, 그 어조가 사뭇 진지했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때는 참 생경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전국지>나 <삼국지>에서였을 겁니다. <손자병법>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지 싶은데 왜 하필 ‘도망이 최고다’라고 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싸워 이기는 법’이 병법인데 ‘도망이 최고다’라니요, 황당하기까지 했습니다. 덕분에 수십 년 후에도 이렇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주역 서른세 번째 ‘천산돈’(天山遯), 돈괘(遯卦)를 보니 그 옛날의 황당했던 독후감이 떠오릅니다. 해리슨 포드의 <도망자>와 함께 그때의 그 황당함이, ‘도망이 최고다’라는 말을 대했을 때의 그 당혹감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주역의 ‘무엇에서든 도망치라’는 권고가 그 둘을 동시에 불러냅니다.     


구사는 좋아도 도망하니 군자는 길하고 소인은 비색(否塞, 운수가 꽉 막힘)하니라. -- 밖에 처해서 안에 응함이 있되 군자는 (응함이) 좋아도 도망하므로 (혹은 잘 도망하므로) 그를 버릴 것이요 소인은 매달려 그리워하니 이로써 비색하다.

구오는 아름다운 도망이니 바르게 해서 길하니라.

상구는 살찌는 도망이니 이롭지 않음이 없느니라(肥遯无不利).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264~265쪽]    

 

초육, 육이, 구삼, 앞의 효사들은 ‘도망치지 못할 때의 흉함’에 대해서 주로 말하고 있고 뒤의 효사(구사, 구오, 상구)들은 위의 인용에서처럼, 주로 ‘좋은, 아름다운, 살찌는’ 도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돈괘는 도망해서 뜻을 바르게 하고 때에 맞게 살라는 권고입니다. 영화 <도망자>를 생각해 보고, 또 제가 겪은 그 비슷한 신세를 떠올려 보니, ‘36계 줄행랑’이 최선의 처세술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싸우지 않을 수만 있다면 싸우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본의 아니게 싸움판에서 싸움닭으로 수 십 년 살아본 소회이니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는 신세가 되고 보니 ‘살찌는 도망’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매달려 그리워하는’ 일만큼 못난 것도 없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천산돈(天山遯)! 비돈무불리(肥遯无不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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