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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11. 2019

근심없이 사는 법

주역, 풍화가인

근심 없이 사는 법풍화가인(風火家人)   

  

‘풍화가인’(風火家人)이라는 말이 주역에 나오는 말이었군요. 아주 옛날에 어느 글에서 본 적이 있었습니다. 누구의 글인지, 어떤 맥락이었던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저 그 말만 가물가물 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납니다. “가인(家人)은 이여정(利女貞)하니라”가 주역 서른일곱 번째 ‘풍화가인’, 가인괘(家人卦)의 경문(經文)입니다. 불이 바람에서 나오듯(집에서 불을 지피고 지키는 사람은 안방마님입니다) 안에서 받쳐주고 밖에서 이에 호응하여 군자의 삶은 더욱 치열해진다고 상전(象傳)의 풀이는 밝히고 있습니다. 내조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로 읽힐 수도 있겠습니다. 효사(爻辭)를 살피니 각자가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고 ‘근심 없이 행복하게 살기(勿恤而吉)’를 권면하는 내용 일색입니다. 이런 내용을 대하면 달리 덧붙일 말이 없습니다. 좋은 말씀에 순응해 제 본분을 다할 것을 다짐할 뿐입니다.     


달리 덧붙일 말이 없으므로, 엉뚱하지만, 대표적인 반(反) ‘풍화가인’적 인물로 손꼽을 수 있는 이야기 속 ‘안방마님’이 누구였던가를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동서양의 옛이야기 속에서 악역을 맡은 계모들(신데렐라, 백설공주, 장화홍련 등에 등장하는)이나 <흥부가>의 놀부마누라, <심청가>의 뺑덕어멈 같은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그 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백설공주」의 계모 왕비(여왕)겠습니다. 자신의 미색(美色)을 무색케 만든다는 이유 하나로 자기 의붓딸을 죽이라고 사주하는 새어머니이니까요. 자기 딸을 못살게(진짜 못살게!) 구는 이 모진 여인도 처음부터 반(反) ‘풍화가인’적인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백설공주가 일곱 살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공주의 미색이 눈에 띠기 전에는 악인이 아니었습니다. 공주가 성장해서 아름다워지자 그렇게 흉해진 것입니다. 친딸이라도 섭섭했을 것인데(원래 무의식에서는 친딸과 의붓딸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전처의 딸이 ‘미의 여왕’ 자리를 뺏으려고 호시탐탐 노리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악의 화신이 됩니다. 파리스가 황금 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준 이래로 ‘미인(美人), 가인(佳人)’을 능가하는 가치가 여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여자에게 ‘미(美)의 중심이 되는 자리’는 언제 어디서나 목숨을 걸고 다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이었습니다. 신데렐라가 받은 구박보다 백설공주가 당한 구박(보복)이 훨씬 더 잔혹해야 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실 신데렐라와 백설공주는 출신 성분이 많이 다릅니다. 그만큼 이야기의 급에 있어서도 차이가 많이 납니다. 미색을 다투는 것과 먹는 것을 다투는 것, 그리고 갈등의 주체가 모녀 사이인 것과 형제(자매) 사이인 것도 두 이야기의 격을 나누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전자 쪽이 아무래도 이야기의 깊이가 깊습니다.   

  

백설공주가 급이 좀 높은 이야기인 탓인지 그 이야기를 심히 과하게 분석하거나 패러디하는 사람들도 종종 나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저 ‘새하얀 눈 아이’라고 해야 될 것을 여왕의 딸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공주’라 부르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백설이 생명의 원천이라는 식의 텍스트 무의식이 전하는 메시지)를 많이 훼손하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일단 ‘공주’로 불리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원전 어디에도 공주(Prinzessin)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남녀의 사랑에 의해서가 아니라 “눈처럼 새하얗고, 피처럼 붉고, 창틀의 나무처럼 검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이라는 주술적인 ‘여왕의 바람’에 의해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백설공주였다는 점이 그런 주장의 근거입니다(이양호,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 글숲산책, 2008).   

  

...앞에서 우리는 ‘눈’은 어느 동아리에 속하고, ‘피’는 또 어디에 속하는지를 파헤쳐봤어요. 그러면 ‘창틀의 나무’는 어느 동아리죠? 그 나무는 무슨 색깔을 띠고 있죠? 흰빛인 하늘, 붉은 빛인 사람이 이미 나왔으니 이제 뭐가 남았죠? 하늘과 사람에 견줄 만한 동아리가 뭐가 있죠? 하늘과 사람 빼고 나면, 뭐가 남죠? 그래요 땅이에요. ‘하늘·사람·땅’ 이제 아귀가 맞네요. 이 이야기에 나오는 세 색을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고, 독일의 한 학자도 그렇게 느꼈다는 걸 알리고 싶네요. 『그림 형제의 옛이야기는 무엇을 말하고 있나』를 지은 쿠르트 슈티아스니가 그예요. 그는 이 책에서 “원리 속에 있는 헤아림의 얼개(사유체계)는, 색의 상징을 통해 이 이야기 처음부터 보이고 있다. 검정은 어둠의 색을, ‘새하얀’은 빛의 색을, 여기에 붉은 색이 함께 하는데, 그것은 피의 색 즉 생명의 색을 뜻한다”라고 밝혔어요. (이양호, 위의 책, 116~117쪽)     


백설공주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한 몸에 품고 태어난 특별한 존재라는 설명입니다. 우리 단군신화의 웅녀와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요? 백적흑(白赤黑) 삼색이 고작, 태어날 아이의 겉모습(뛰어난 용모)의 특징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에 유의해야 ‘백설, Snowwhite’의 올바른 독해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해석의 의의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친 몰입, 과도한 분석은 그야말로 ‘알쓸신잡’이 될 공산이 큽니다. 재미로야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때로는 반(反) 풍화가인적인 역기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모든 전해지는 이야기들에는 사회역사적 효용과 심리적인 효용이 있습니다. 그런 것 없는 이야기들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위의 주장은 듣기에 그럴듯한 면도 있지만 백설공주 이야기의 사회역사적 효용이나 심리적 효용을 충분히 반영해 내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백설공주 이야기가 지닌 이야기로서의 재미와 효용을 많이 탈색시키고 있습니다. 재미지게 공감하는 게 이야기의 첫째 존재 이유인데 그것을 무시하고 오직 자기가 아는 지식과 그 작품이 연결될 수 있는 부분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상징’에만 몰두하다 보니 작품의 핵심인 ‘갈등’은 아예 관심 밖입니다. 결국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라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백설공주를 무당으로 만든다고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지나요? 괜히 필요 없이 머리만 복잡해질 뿐이지요. 


독일어 ‘Märchen’이 ‘동화(童話)’로 단순 번역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림 형제의 옛이야기는 한때 유행했던 ‘잔혹 동화’의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 어느 곳에서든 옛이야기는 당대의 민중적 삶이 상당 부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민중들의 세속적인 염원과 자신들의 비행(非行)에 대한 무의식적 합리화가 문맥 사이사이에 끼어들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우리의 판소리를 생각해 봐도 금방 알 일입니다. 춘향이든 심청이든 흥부든 옛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작은 인간들의 생존법’을 충실하게 이행합니다. 그들 작은 인간들이 아무도 생각지 못한 ‘큰 사고를 치는 이야기’가 춘향전이고 심청전이고 흥부전입니다. 그러니 옛이야기를 읽을 때는 딱 그만큼만 읽어내야 합니다. 그 이상의 해석은 과분수를 만듭니다. 이야기 자체를 부정하면서 지식 하나 더 얻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소탐대실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원초적인 동경, 여성들이 목숨 거는 절대미(최고의 아름다움)의 세계, 모녀 사이마저 갈라놓는 그 못 말리는 ‘비너스의 충동’에 대해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마디씩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핵심입니다. 나머지는 다 선택적인 자유 모티프(free motif)일 뿐입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색상들도 결국은 자유 모티프 중의 하나일 뿐이지요. 그걸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은 본말을 전도시키는 일일 뿐입니다. 「백설공주」에서는 미(美)를 다투는 여성의 심리 그것만이 필수적인 모티프(bound-motif)라 할 것입니다.   

  

...새하얀 눈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는데, 자랄수록 더욱 아름다워져서, 일곱 살(열일곱 살을 과장되게 표현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인용자 주)이 되었을 때는 맑은 날만큼이나 아름다웠지. 그러니 그 여왕보다도 더 아름다워지지 않았겠니? 하루는 여왕이 그 거울에 또 물었지. “조그만 거울아, 벽에 걸린 조그만 거울아, 이 나라를 통틀어서 누가 제일 아름답니?” 그러자 그 거울은 “여왕 마마님, 여기서는 마마님이 제일 아름다워요. 그렇지만, 새하얀 눈 아이가 마마님보다 몇 천 배나 더 아름답습니다.” (이양호, 위의 책, 33~34쪽)     


‘백설공주’는 위에서 인용된 한 단락만으로도 충분히 ‘백설공주’입니다. 아름다움 하나만으로그녀는 영원한 공주이고 승자입니다. 천지인 삼재 이야기는 그에 비하면 한낱 우수마발(牛溲馬勃, 하찮은 것의 대명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만들어낸 상징’은 혼자서 그저 재미로 한 번 해 볼 일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아무 생각 없이’ 그녀의 이름에 ‘공주’를 덧붙였다면 그래서 백설은 진정한 공주다고도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라니 답답할 뿐입니다”라고 말한 대장금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당연한 것에 이런저런 토를 단다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지식 자랑꾼의 소행에 불과할 뿐입니다. 아주 반 풍화가인적인 처사일 뿐입니다.     


사족 한 마디.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습니다. 고래로 백성들이 좋아하는 고위공직자는 청렴하고 강직하고 공평무사한 사람입니다. 직무 능력은 그 다음입니다.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그 세 가지 덕목에 흠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백성들은 다 싫어합니다. 그런데 그 세 가지 관문을 통과하는 사람이 참 드뭅니다. 신문방송을 통해 전해지는 탈법과 축재 사례들이 문자 그대로 ‘상상초월’인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예 40대 이하에서 사람을 골라보자는 말까지 나옵니다. 50대 이상에서는 그런 세 가지 기준을 만족시키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아예 없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우리가 험한 세월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농반 진반 식 주장도 평생 시골에서 풍화가인이나 읊고 있는 60대에게는 꼭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넘치는 방법도 가지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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