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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12. 2019

초석적 폭력의 힘, 신세계

이자성에 대한 오마쥬

초석적 폭력의 힘, <신세계>     

오늘 이야기는 영화 <신세계>(박훈정, 2013)에 대한 것입니다. 단도직입, 이 영화는 누가 뭐래도 ‘폭력에 관한 한 연구’입니다.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모든 권력 관계(역학 관계)를 폭력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모든 권력은 어쩔 수 없이 폭력성을 그 내재적 속성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따박따박 그려냅니다. 이런 식의 스토리텔링은 이미 <부당거래>(류승완, 2010)에서 한 번 진하게 선보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당거래>가 공권력의 폭력성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폭력의 육체를 욕심만큼 생생하게 드러낼 수 없었다면, <신세계>에서는 서술의 초점을 폭력 조직 안에 둠으로써 좀 더 구체적으로 폭력의 속살들을 그릴 수가 있었습니다. 박훈정 감독이 시나리오를 담당한 <부당거래>나 <악마를 보았다>(김지운, 2010)에서처럼 현실 고발이나 인간 심리의 내밀한 부분에 대한 터치와 같은 이른바 ‘작품적 요소’들이 좀 빠진다는 자격지심(?)도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 대신에 신나는 활극(오락성)을 듬뿍 얻었 으니 관객 입장에서는 그리 크게 손해 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저기서 <신세계>에 대한 상찬이 들려옵니다. 감독 스스로가 자신의 영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마침 『위클리 공감』이라는 책자에 참고가 될 만한 감독 인터뷰가 실려 있는 것을 봤습니다. 일부를 옮겨보겠습니다.     


... <신세게>는 속편에 대한 여지를 남겨놓고 끝난다. 이정재와 황정민, 두 사람의 회상 신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많은 질문이 가능하다. 이정재와 황정민의 우정은 어떻게 시작했는지, 과거에 경찰을 배신한 인물은 누구인지, 석 회장을 죽음으로 내몬 인물은 누구인지 등 프리퀼(Prequel: 전편보다 시간상으로 앞선 이야기를 보여주는 속편)에 대한 궁금증을 남겨놓는다. <신세계>를 유심히 관찰한 관객들은 눈치챘듯이 이 영화의 스토리텔링은 구조적으로 ‘중간’, 즉 몸통에 해당한다. 감독의 말을 들어보자.

“<신세계>는 명백히 인물의 개인사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난 권력의 탄생에 대한 근원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표면적으로는 강 과장(최민식)과 정청(황정민)을 비롯해 조직 안에서 정청과 아귀다툼을 벌이는 이중구(박성웅)까지 개인이 보이지만, 그들은 각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세력이 충돌하는 이야기이므로 개인적인 사연으로 빠질 이유가 없었다. 그들의 사연은 전사(前史)에 있을 텐데 <신세계>는 이미 어느 정도 상황이 진행된 상태에서 벌어지는 내용이다. 애초에 생각했던 이야기의 딱 중간 부분인 셈이다. 기회가 되어 속편을 만들 수 있다면 인물의 전사를 다룰 생각이다.”

속편을 기대해도 좋다는 이야기다. 구체적으로 더 들어가 보자. <신세계>는 1990년부터 2013년까지 23년간을 다룬 영화다. 강 과장이 기획한 프로젝트가 실패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폭력배 정청과 언더커버로 그의 조직에 들어간 이자성(이정재)이 결합하는 과정에서 강 과장이 원하던 대로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진다. 정청과 이자성은 여수를 통합하고 서울로 올라와 ‘북대문파’를 만든 뒤 석 회장(이경영) 조직과 충돌을 일으켜야 하는데, 여기서 정청이 물리적 충돌 없이 담판을 지어 석 회장 밑으로 들어가 버린다. 정청을 만만하게 봤던 강 과장이 판단 오류를 일으킨 셈이고, 그렇게 두 조직이 합쳐져 골드문이 탄생한다.

“<신세계>는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뒤의 이야기다. 전체 내용으로 보면 2부 격인데, 앞부분의 이야기를 풀자니 관객의 부담이 상당할 것 같았다. 반면 지금 이야기는 대단히 장르적이고 쉬우니 먼저 선보이기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세계>는 갱스터 영화의 자장 안에서 한국형 누아르의 탄생을 선언했다. 충무로의 기념비적인,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그리고 감독으로서 박훈정의 발견은 올해 충무로가 거둔 의미 있는 수확 중 하나다. [글․ 지용진(매거진 M 기자)]     


위의 인용 글에서 따옴표로 표시된 감독의 이야기(육성)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권력의 탄생을 그리고 싶었다”이고 다른 하나는 “속편, 즉 <무간도>식 프리퀼을 만들고 싶다”입니다. 후자부터 보겠습니다. ‘폭력 조직 안에 잠입한 경찰 스파이’라는 핵심적인 모티프를 <무간도>에서 빌려온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그 구성도 답습하겠다는 감독의 당당한 목소리가 듣기 좋습니다. 베껴서 뱀꼬리를 만들면 곤란하겠지만(이런 글도 따라 붙지 않겠지요), 청출어람일 경우에는 그저 당당한 ‘전통의 승계(承繼)’일 뿐입니다. 위의 인용 글에서도 그렇게 평가하고 있지만, <신세계>는 단순한 리메이크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수작(秀作)급 모작입니다. 그야말로 그 방면 ‘장르 영화(갱스터 장르)’의 새 장을 열었다고 할 것입니다. 전문 용어로 ‘인과성’과 ‘전체성’을 갖춘 탄탄한 서사의 뼈대와 박진감 넘치는 화면 구성, 그리고 숙련된 연기자들의 열연(연기파로 알려진 최민식이 그 중에서 가장 빠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등이 한데 어우러져서 완성미 있는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속편도 전편 못지않은 작품이 될 것으로 기대가 됩니다.    

 

“권력의 탄생을 그리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은 ‘폭력의 본질’을 그려내고 싶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권력의 탄생’은 항상 폭력을 동반합니다. 그것을 두고 르네 지라르는 ‘초석적 폭력’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모든 권력 관계의 시작은 어차피 ‘폭력’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신세계>를 보면 그 ‘폭력’이 결국은 ‘피와 땀’의 소산이라는 작가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피와 땀’이 배어있지 않은 카리스마는 결정적인 순간에 ‘폭력의 서열’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뒤로 밀리게 되어 있습니다. 초석적 폭력은 세속적인 계산법이 적용될 수 없는 자기만의 진법(進法)을 따로 가지고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이자성(이정재)이 권력(폭력)의 꼭대기라는 게 드러나는 것도 그의 존재, 그의 폭력(권력)이 ‘초석적 폭력’에 속한다는 걸 극적(劇的)으로 보여주기 위한 감독의 의도적인 장면 구성이라 할 것입니다.     

<신세계>가 <대부>와 <무간도>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빌려온 영화라는 것을 감독도 자인합니다. 감독 말로는 특히 <대부> 신세를 많이 졌다고 합니다. 그 영화를 100번 이상 봤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 영화보다도 <영웅본색>을 <신세계> 안에서 더 많이 만났습니다. 특히 이자성(이정재)이라는 인물의 등장이 그런 느낌을 더욱 들게 했습니다. 그의 외모와 이름, 조직 안에서의 위상이 <영웅본색>의 ‘아성(이자성)’이라는 인물에 대한 오마쥬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사실 <영웅본색>이라는 영화가 사는 데에는 ‘아성’이라는 악역 인물의 역할이 아주 컸습니다. <영웅본색> 하면 모두 주윤발만 기억하지만, 사실은 그때만 해도 주윤발은 넘버 쓰리였습니다. 자호(적룡)와 아성(이자성)의 대결이 극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소마(주윤발)는 누가 봐도 빛이 덜 나는 배역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살린 것은 물론 그 자신의 연기자로서의 내공과 멋있는 극중 캐릭터였겠습니다만, 그것 이외에도 또 하나 결정적이었던 것은 아성이라는 극악한 인물의 존재였습니다. 그는 그 악인의 대극에 서서 그의 핍박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선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배역의 힘이 컸습니다. 물론 절대악 아성의 연기가 그런 그의 배역을 받쳐주지 않았으면 그의 성공은 절대 없었을 것이 분명하고요. 그렇게 보면, <영웅본색>을 살린 것은 사실 이자성이라는 배우였습니다. 그가 네온사인 명멸하는 화려한 빌딩의 옥상에서 자신을 돌봐 준 선배이자 자신에게 두목의 자리를 양보한 ‘소마(주윤발)’에게 사정없이 린치를 가하는 장면은 가히 불후의 명장면이라고 할 것입니다. “네가 진짜 영웅이라면 이 수모를 견디지 말고 당장이라도 여기서 뛰어내려라”라고 그는 소마를 조롱합니다. 그런 용기가 없으면 순순히 감옥에서 나온 자호를 설득해 자신들의 사업에 협력하도록 하라는 겁니다. 어제의 ‘형님’을 오늘의 부하로 부려먹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그는 타고난 악인입니다. 그 불패의 악역이 없었으면 <영웅본색>의 의리담론은 전혀 설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됩니다. 주윤발도 없고 장국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의리 있는 자들을 드러내기 위한 ‘버리는 카드’였습니다. 어디까지나, 멋있고 의리 있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자타공인, ‘초석적 폭력’으로 인정받는 ‘형님’들뿐이었습니다. 그는 힘을 가졌지만 스스로 그 힘을 창출해내지 못한 자였기 때문에 패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원했건만 ‘초석적 폭력’으로 끝내 인정받지 못하고 쓸쓸히 죽어갑니다. 그런 ‘이자성’이 <신세계>에서는 최후의 승자가 된다는 것(이정재의 극중 이름이 이자성입니다),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는 ‘초석적 폭력’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 저는 보기가 좋았습니다. <영웅본색>을 잊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그 오마쥬가 특히 좋았습니다.

동아시아 의리담론의 한 정점에 『삼국지』가 있고, 그것의 현대적 ‘내려앉기’로서 <영웅본색>이 있다면, <신세계>는 <영웅본색>의 또 다른, 세련된, 버전(강남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의리 없는 놈들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삼국지』의 주제가 <영웅본색>을 거쳐 <신세계>로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는 것을 보는 재미도 꽤나 쏠쏠하다 하겠습니다. 

     

사족 한마디. <신세계>에서 정청(황정민)이 이자성(이정재)이 경찰이라는 걸 알았으면서도 그를 징벌하지(죽이지) 않은 까닭이 무엇이었을까가 궁금합니다. 죽기 직전에 이자성을 불러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하면서 죽는 그의 심사를 관객들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 까닭이 자연스럽게 밝혀지는 것이 앞으로 나올 프리퀼의 내용이 되지 싶습니다. 속편이 전편보다 더 재미있으려면 그런 궁금증을 속시원히 풀어내는, 인과성과 전체성을 두루 갖춘, 서사의 힘을 가져야 합니다. <무간도>의 2편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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