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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12. 2019

무심한 하늘의 도

호랑이 부자도 서로 사랑한다

무심한 하늘의 도()    


“도(道)는 항상 가까운 데 있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 비슷한 믿음(희망)이 도처에 널려있다. “글은 쉽게 써야 한다”,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 "못 생긴 건 용서가 돼도 재미없는 건 용서가 안 된다" 등등이 그 비슷한 것들이다. 모두 "나를 불편하게 하면 싫다"라는 저항 심리를 드러내는 말들이다. 쉬워서 나쁠 게 있을까?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다는 걸 마다할 이는 없다. 무료한 삶을 재미있게 해 준다는 데 싫어할 이도 없다. 문제는 우리 인생이 그런 걸 잘 허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의 희망이나 믿음과는 전혀 별개로 진행되는 게 인생이다. 그런 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원하는 대로 되는 건 인간의 삶이 아니다.


성인들이 말하는 도는 늘 멀다. 쉽지도 않다. 물론 재미도 없다. 가깝고 쉽고 재미진 것들이 도가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고 성인들은 가르친다. 그래서 복창한다. 가깝고 쉽고 재미진 것들은 도가 아니다. 그런 믿음에 쉽게 빠져드는 사람은 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도에 대한 믿음보다 돈(세속적 욕망)에 대한 희망이 강한 사람들이다. 돈(욕망 실현) 말고는 그들에게 가치 있는 일이라곤 없다. “진리는 가까이 있고 쉽게 표현될 수 있다”라는 믿음도 당연히 헛된 희망이다. 진리가 그렇게 ‘가까이 있고 쉬운’ 것이라면 애당초 그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갈 일도, 실의에 몸져누울 일도, 머리 깎고 입산수도 할 일도 없다. 산다는 일 자체가 인생 최대의 난제인데 어떻게 몇 마디 말로 해결책이 설명될 수 있겠는가?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가깝고, 쉽고, 재미진 것들’이 어떻게 구원이 될 수 있겠는가?


... 상(商)나라 재상 탕(蕩)이 장자(莊子)에게 인(仁)을 물었다. 장자가 대답했다. “호랑이와 이리가 인입니다.” 탕이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요.” 장자가 대답했다. “호랑이 부자(父子)도 서로 사랑합니다. 어찌 인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탕이 말했다. “지극한 인을 듣고 싶은데요.” 장자가 대답했다. “지극한 인에는 친(親)이란 것이 없습니다.” 탕이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무친(無親)이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사랑하지 않으면 불효라고 하던데 지인(至仁)은 불효해도 된다는 것인지요.” 장자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지극한 인이란 말씀하신 것보다 높은 경지입니다. 효(孝)만을 들어서 지극한 인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효도를 넘어섰다는 말이 아니라 효 따위로는 미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장자』 외편, 「천운(天運)」, 윤재근, 『우화로 즐기는 장자』 참조]


경전(經典)의 질문자들은 언제나 상식(가깝고 쉬운 것을 탐하는)을 대변한다. 성인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상나라 재상 탕(商太宰蕩)은 인(仁)에 대해 묻는다. 어느 정도 위치를 가진 사람이 무엇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그 방면에 좀 아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는 이미 스스로의 ‘발견’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백성을 아끼고 부모를 공경하라”와 같은 성인의 대답으로 그 발견이 확인되기를 원한다(장자에게서 그런 대답을 기대한다). 자기는 그 정도는 ‘실천’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도 있다. 그 물음은 동시에 공맹(孔孟)의 그러한 가르침에 대한 평가도 요구한다. 공맹의 말이 ‘가깝고 쉽’던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게 묻는 것일 수도 있다. 당연히 장자는 그의 기대를 배반한다.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일단 '공맹'을 부정한다(헛공부했다고 면박을 준다). ‘공맹’류의 이야기는 그저 상대적인 것들(진리 아님)이라고 답한다. 그것들은 인간의 좁은 시야(사회 역사적 환경) 안에서만 ‘설득’이 될 뿐, 그 자체로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노자의 천도무친(天道無親)을 가져와서 “지극한 인에는 친(親)이란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탕은 반문한다. 효와 인이 모순관계에 놓이면 되느냐고 묻는다. 아직 그는 ‘생명’이 차지하는 우주적 비중을 아직 모른다. 무친을 강조하는 장자의 생명사상은 아상(아상과 연관된 일체의 관계)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 함의를 모르고 끝내 효와 인에 집착한다.


여기서 한 걸음 잘못 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천도든 인도든, 공맹이든 노장이든, 말뿐이기는 어차피 초록은 동색, “오십 보 백 보다”라고 여기면 패가망신이다. 어차피 인간세(人間世)는 호랑이와 이리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니 천도만 무친(無親)한 것이 아니라 인도(人道)도 무친(無親)이기는 마찬가지라고 믿고 행하면 금수(禽獸)가 된다. 살면서 ‘인간’이라는 말이 곧 ‘호랑이와 이리’를 가리키는 말임을 아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요치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을 굳이 나누어서 인간을 높이 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걸 알면 인간이고 모르면 금수다.


사족 한 마디, 정치가 다 똑같은 것 같아도 인간이 하는 게 있고 금수들이 하는 것이 있다. 그걸 섞어서 함부로 말하는 것("정치하는 자들은 다 똑같다")은 ‘인문(人文)’을 모르는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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