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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13. 2019

통도사 가는 길

무의식의 자기 표현,  재독

통도사 가는 길   

  

「통도사 가는 길」(조성기)을 다시 읽었다. 재독(再讀)은 보통 ‘특별한 내면의 요구’에 부응할 때가 많다. 의식은 포착하지 못하지만, 무의식이 나서서 무엇인가를 조회(照會)할 필요가 있을 때 재독이 이루어진다. 무의식이 자주 사용하는 고전적인 자기표현 방법 중의 하나다. 무의식이 본능에 친화적이고 당연히 야만적이고 반문화적인 충동일 것이라는 생각은 큰 오해다. 무의식은 종종 최상층의 문화를 이용해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먼 곳으로의 여행이나 ‘손에 잡히는 독서’ 같은, 순수한 교양 욕구의 표피를 쓰고 오래된 억압들의 게릴라 활동을 방조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무목적의 목적’이라는, 일반적으로 널리 회자되는 예술의 효용도 “예술은 전적으로 무의식의 활동 영역이다”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재독은 그러므로 ‘무의식의 여행’, ‘무의식으로의 여행’, ‘무의식을 위한 여행’이다. 재독 리스트를 작성해 보면 자신의 내면에 그려진, 마치 심해(深海) 지도와 같은, 트라우마의 여러 얼굴들과 대면할 수 있다.   

  

재독이 무의식의 소관이라는 말을 해 놓고 보니, “움직이는 정신의 항구에 한 번 정박했던 배는 언제가는 반드시 돌아온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어딘가에서 한 번 썼던 말인데, 창작인지 인용인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인문학 하는 이들이 늘 그러하듯, 보통은 술이부작(述而不作), 언제가 어디선가 한 번 본 것들을 옮길 때가 많은데, 그 출전이 모호할 때가 종종 있다. 어떻든 책의 진정한 가치는 ‘다시 찾은 정신(영혼)의 항구’에서 발견될 때가 많다. 재독(再讀)일 때 그 책이 왜 내 것인지가 판명된다. 달리 말하면 결혼 대상자를 만나는 이치와 같다. 초대면만으로는 내게 맞는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초독(初讀)은 그저 상대의 얼굴만 보고 헤어진 경우다. 첫인상이 좋다고 꼭 좋은 반려자가 되라는 법은 없다. 살아 봐야 좋고 나쁘고를 알 수 있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그 내용이 내 안에 들어와 내 과거와 현재를 두루 겪어봐야 내 책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내 콘텍스트, 내 삶의 맥락 안에 독서 텍스트가 들어와야 비로소 진정한 읽기가 성사된다. 그래서 한 번 읽어서는 늘 부족하다. 우연한 재회(再會) 때 인연이 맺어지는 경우가 많듯이, 독서도 재독 때 의미가 만발한다.  

    

재독은 겉보기에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진다. “우연히 손에 잡혔다.”라는 말이 재독의 독후감 앞에 잘 붙는다. 그러나 재독이란, 성공적인 연애에 있어서의 모든 재회(再會)들이 다 그러하듯, 우연의 탈을 쓰고 나타날 뿐,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미 초독 때 앞으로의 향후 계획이, 그 책과 나의 미래의 일정이, 잡힌 일이다. 물론 그런 스케줄 잡기는 무의식의 관할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진행된다. 무의식의 행사는 인내를 요구할 때가 많다. 무의식은 참을성 있게 움직이는 정신의 항구가 열리는 때를 기다린다. 항로가 열리고 배가 돌아올 때는 보통 밤이다. 주위는 캄캄하고 오직 항구의 불빛만 찬란하다. 불 밝힌 부두의 화려찬란(華麗燦爛) 속으로 배가 들어오는 광경이 꽤 볼만하다. 거듭 말하지만 이 세상에 우연한 재독이라는 것은 없다. 오래 기다린 첫사랑의 귀환만 있을 뿐이다.


우연을 가장하고, 내 정신의 항구에 다시 돌아온 「통도사 가는 길」은 큰 배는 아니었다. 거친 파도와 싸우며 많이 단련된, 작고 단단하고 단아한 배였다. 선수(船首)에 새겨진 ‘고집멸도(苦集滅道’가 선명했다. 생로병사의 괴로움(苦)과 그것의 원인이 되는 번뇌의 모임(集), 번뇌를 없앤 깨달음의 경계(滅)와 그 깨달음의 경계에 도달한 수행(道)이 자신의 선적지라는 것을 따박따박 적고 있었다. 

고집멸도, 해탈을 꿈꾸는 자들의 성전인 통도사 대웅전 불단에는 부처가 없다. 뒤편의 금강계단 석종부도에 불골(佛骨)과 불가사(佛袈裟)가 모셔져 있어 따로 부처의 상을 두지 않는다는 취지다.   

   

... 그것은 허공이었습니다. 허공으로 인한 충격이 나를 내려앉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광경에 넋을 잃어버렸습니다.

불단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붉고 푸른 연화문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3층 불단은 그 너머 허공으로 통해 있었습니다. 그 허공은 막연한 형태로가 아니라 가로 누운 긴 직사각형으로 반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단아한 허공이었습니다.[중략]

한 순간, 5층 석탑의 무게로 나를 내리누르고 있던 그녀의 존재가 시선이 머물고 있는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나마저도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녀도 없고 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텅 빈 삼랑진역 플랫홈에 어머니만 홀로 서 있었습니다. 허공 속에서도 법당 뒤편 금강계단의 석종부도 꼭대기가 마치 선덕여왕의 한쪽 유방처럼 봉긋이 떠 있었습니다. 그 유방의 젖을 먹고 자라는 듯 금강계단 너머로는 신선한 녹색의 숲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 석종부도 속에 모셔져 있다는 싯달타의 사리마저 허공으로 사라져버렸기를 바랐습니다. [조성기, 「통도사 가는 길」 중에서]     


「통도사 가는 길」의 주인공이 통도사의 ‘통도’가 통도(通道)가 아니라 통도(通度)라는 것을 아는 순간의 묘사다. 도(道)는 내 안의 것이고 도(度)는 우리 안의 것이라는 깨달음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그 ‘순간 이동’이 왜 있고 왜 필요한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재독이 내게 찾아온 듯했다. 「통도사 가는 길」을 다시 읽고 내가 한 일은, 엉뚱하게도, 통도사가 아니라 삼랑진역을 다시 찾는 노고(勞苦)였다. 삼랑진역은 몇 개의 각각 분리된 이미지들이 모호하게 하나의 틀 안에 모여 있는 내 무의식의 저장고 중의 하나였다. 그 이름이 처음 내게 들어온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아버지는 또 한 번의 불운을 겪으며 그동안의 고(苦)와 집(集)들을 모두 내팽개치고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형식은 야반도주(夜半逃走)였다.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집을 나와 대구역에서 만났다. 남행열차를 탔다. 부산행 열차를 타고 가다 삼랑진에서 내렸다. 역사 앞의 중국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부산과 마산을 두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행선지를 의논했다. 마산으로 결정되었다. 그곳에는 어머니의 작은 할아버지(증조부의 늦둥이)가 법원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그때 처음 우리 가족의 미래가 결정되는 방식을 보게 되었다. 피난지 제주도에서 올라와 목포에서 서울행 기차를 탔을 때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형이 언젠가 말했다. 기차가 한강 철교를 지날 때였다. 오랜 여정으로 모두 지친 표정으로 맥을 놓고 앉아있는데 아버지가 “와, 한강이다!”라고 소리를 지르더라는 거였다. 형은 그때 아버지의 얼굴이 참 낯설었다고 했다. 형은 그때 이미 아버지와 결별했던 것이다. 


어쨌든 삼랑진은 그런 식으로, 억울하게도, 내게는 최초의 디아스포라로, 이산의 경험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몇 년 뒤, 내가 전혀 다른 두 세계를 오고갈 때마다 마주치는 관문(關門)이 되었다. 삼랑진역은 때로 출구로, 때로 입구로 내 고(苦)와 집(集)의 대명사가 되었다. 경전선을 벗어나 경부선으로 진입할 때마다 나는 해방의 쾌를 느꼈다. 나이가 들고, 경부선 축에 놓여 살고 있는 지금도 역시 삼랑진은 그때의 관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다만, 이제 경전선과 경부선이 서로의 역할을 맞바꾸고 있다는 것만이 다르다. 언제부턴가 나는 마산을 안식의 근거지로 삼고 있다. 퇴직 후에는 그쪽에다 작은 집필실을 하나 마련할 생각도 하고 있다. 

     

다시 찾은 삼랑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역사 앞의 중국집도, 경전선과 경부선을 오고가던 내 비굴과 남루도, 덜컹거리는 두 칸짜리 전동차 안에서 헤어진 첫사랑도, 그곳에는 없었다. 그저 지루하고 초라한 한 장의 시골 풍경화만 있을 뿐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연히 섰다가 역 앞 철물점에서 고무호스를 3m 샀다. 요즘 들어 창가로 떼 지어 몰려드는 비둘기들이 골치였다. 오전 내내 창틀에 앉아서 구구거리며 양광(陽光)을 즐겼다. 창틀에 덕지덕지 앉은 비둘기똥을 물로 씻어내려면 그 정도의 길이는 필요했다. 수십 년 전, 그 역사 앞 중국집에서 나는, 부산으로 갈 것인지 마산으로 갈 것인지를 어머니에게 묻던 젊은 아버지의 그 끝 모를 무력감에 절망했었다. 그 절망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나는 일찍이 아버지 곁을 떠났다. 요령부득, 그저 삼랑진을 경유해 경전선에서 경부선으로 내 몸을 옮겨 실어야 했다. 그 와중에 첫사랑과의 마지막 이별도 거기서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깨끗하게 리모델링한 삼랑진 역사만 있을 뿐이었다. 마치 통도사의 불단처럼 그곳에는 내가 기대했던 그 어떤 그림도 없었다. 그저 텅 비어 있었다. “불단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붉고 푸른 연화문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3층 불단은 그 너머 허공으로 통해 있었습니다.” 복층의 현대식 역사는 시원한 유리창으로 통째로 덮여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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