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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14. 2019

이마에 문신이 찍히고

주역, 화택규

이마에 문신이 찍히고     

 

젊어서는 소설을 좀 썼고 이후로는 대학에서 현대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처지라 본디 한학(漢學)과는 거리가 먼 신세입니다만, 나이 들어서 한 번씩 주역(周易)을 펼쳐 봅니다. 굳이 점 볼 일은 없지만, 때로 마음을 다스릴 일이 아직도 남은 탓입니다. 요즘은 주로 “어떤 책을 한 권 남길까?”를 두고 고민합니다. 이것저것 손을 대 보지만 해답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일이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 탓이라 여깁니다.

주역을 읽다 보면 문득문득 ‘또 이 말씀?’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주역도 사람이 쓴 글이라 지은이의 체취가 물씬물씬 풍기는 특별한 단어나 구절이 있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저자의 기호’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 주역의 저자는 주(周) 문왕(文王)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들인 무왕(武王)과 함께 주나라의 건국 시조로 숭앙되는 사람입니다. 특히 공자님에 의해서 많이 떠받들여지는 분입니다. 공자님이 본인 말씀의 출전을 밝히면서 ‘옛 성인의 말씀’이라고 했을 때 그 ‘옛 성인’ 중의 한 분으로 꼽히는 사람입니다.  

   

주 문왕이 즐겨 쓰는 말 중의 하나가 ‘이섭대천(利涉大川)’입니다. “큰 내를 건너면 이롭다.”라는 뜻입니다. 사용되는 맥락을 살펴보면, “수(需)는 믿음이 있으니, 빛나고 형통하며, 곧고 길하니, 큰 내를 건넘이 이로우니라(需有孚 光亨貞吉 利涉大川)’와 같은 방식입니다(주역 다섯 번째 수괘(需卦), ‘수천수(水天需)’). 보통은 큰 결단을 내려야 할 때나 새로운 시작을 도모해야 할 때 이 괘가 나오면 길조로 해석하곤 합니다(물론 반대로 읽어야 할 때도 있고요). 주역의 화법은 특이해서 주(主) 문장보다 그 전 단계의 ‘조건’이, 그러니까 종속절의 내용이,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결론처럼 보이는 문장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는 게 주역의 화법입니다. 우리말 화법을 두고 자주 하는 말 중에 “우리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에 가서 긍정도 되고 부정도 되는 게 우리말 표현의 특징입니다. 주역은 그런 ‘언제든지 뒤집어 질 수 있는 언어의 성찬(盛饌)’의 끝판왕입니다. 일차독법, 이차독법, 삼차독법 식으로 문맥의 진의를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주역식 화법에서는 결론이 항상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반 진반으로, “결과는 언제나 변할 수 있다.”라는 게 주역의 유일한 결론이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입니다. ‘이섭대천’을 두고 봐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주로 사용되는 맥락은 “빛나고 형통하며, 곧고 길하니,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괘가 나왔다고 해도 육효(六爻) 하나하나가 각자의 의미와 조건을 고수하는 한 경문(經文)만 믿을 수는 없다는 게 또한 주역의 화법입니다. 그래서 본인 판단 하에 큰 내를 건널만한 전조(前兆)가 미약할 때는 큰 내를 건너는 것이 결코 이롭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고 주역은 가르칩니다.      


‘큰 내를 건너다’가 모험과 도전의 의미를 지닌 ‘새로운 시작’을 뜻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즐겨 사용한 주역의 저자가 우리네 인생에서 그 ‘새로운 시작’을 매우 중요시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주 문왕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주역을 지었습니다. ‘어둡고 막히고 굽고 흉’할 때에 처하였으므로 항시 ‘이섭대천’을 많이 생각한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것이 ‘저자(나)의 기호’로 굳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쓸 때는 항상 조심스러웠습니다. 일단 한 번 강을 건너면 다시 돌아올 길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어느 정도 살 만큼 살아본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이섭대천을 언급할 때의 문왕의 어조가 항상 조심스러웠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주 문왕은 스스로 그렇게 ‘섭대천(涉大川)’의 절대 필요조건을 심사숙고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성공적인 ‘이섭대천(利涉大川)’을 성취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는 말은 주문왕의 단골 기호이지만 제게도 남다른 느낌을 주는 구절입니다. 문왕처럼 말년에 들어 ‘어둡고 막히고 굽고 흉’한 가운데 처해 있다고 스스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앞서 저의 심금을 울렸던 문왕의 또 다른 ‘나의 기호’, “적중불패(積中不敗) - 가운데에 쌓아서 실패하지 않는다.”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적중불패’는 이미 ‘막히고 굽은’ 상황에서 벗어난 때의 ‘나의 기호’입니다. ‘이섭대천’에 비하면 아주 작은 반성과 다짐의 말이라 할 것입니다. 심사숙고해서 ‘큰 내를 건너는’ 타이밍을 제대로 찾고 과감히 실천에 옮겨 ‘어둡고 막히고 굽은’ 상황을 타개한 연후에 필요한 덕목이기에 비중이 그만큼 감소되는 것입니다. 건너기에 성공한 연후에는 중용의 도를 잃지 않고 ‘섭대천’의 전과 후를 잘 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큰 수레는 가운데에 쌓아서 실패하지 않는다(大車以載 積中不敗).”라는 ‘화천대유’ 괘는 문왕의 심사(心事)가 어느 정도는 안정감을 회복한 뒤의 표현일 것이라 짐작됩니다. 주역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문장 중의 하나가 그것이라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라 짐작합니다.     


오늘은 주역 서른여덟 번째 규괘(睽卦)를 읽습니다. 현재까지 본 주역 괘 중에 ‘화택규(火澤睽)’, 규괘(睽卦)만큼 살벌한 괘가 없었습니다. 단전(彖傳)이든 상전(象傳)이든, 그 해석이 종횡무진 난해합니다. 위로는 불길이 치솟고, 아래로는 물길이 준동하니, 일이 모두 서로 어그러져 보기 흉할 뿐입니다. 이 역시 주역의 화법입니다. 앞부분의 살벌함이 뒷부분에 약간씩 첨부된 ‘위무(慰撫)’를 허언으로 들리게 합니다. ‘허물이 없으리라’, ‘도를 잃지 않음이라’, ‘마침은 있느니라’, ‘뭇 의심이 없어짐이라’ 등으로 효사의 말미가 장식됩니다만 크게 울림을 주지 않습니다. 경문에는 (전체적으로 흉하니) 오직 작은 일에만 길함이 있을 뿐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흉하기만 한 전체적인 괘의 아우라를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육삼의 효사 한 구절만 인용하겠습니다.   

  

육삼(六三)은 수레가 당겨지고 그 소가 끌리며, 그 사람이 이마에 문신이 찍히고 또 코를 베이니, 처음은 없으나 마침은 있느니라. (六三 見輿曳 其牛掣 其人 天且劓 无初有終)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295쪽]     


일이 모두 어그러지면 흉한 일만 생깁니다. 수레를 끌고 가던 소가 오히려 뒤로 끌려나가고(뒷걸음치고), 수레 옆에 섰던 사람들은 참혹한 형벌에 노출됩니다. 본디 흉한 일에 당면해서는 그 ‘처음’이 어딘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법입니다. 지금은 제 인생의 ‘처음’들에 대해서 명료한 자의식이 있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지금 제 앞에 펼쳐지고 있는 여러 ‘마침’들이 그런 반성적 회고를 요구합니다. ‘이섭대천’이든 ‘적중불패’든 ‘마침’의 필수조건들은 그 한참 뒤에나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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